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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책의 반란, <브람빌라 공주>
김혜리 2004-10-15

유례없는 불황 속, 서점에 넘치는 건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쓸모있는’ 책들뿐인 것만 같다. 하릴없는 소일거리로서 책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책이 시계와 다름없는 생활의 유용한 도구가 되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 또 있을까. 이 삭막한 시장에 소리없이 출간된 <브람빌라 공주>는, ‘쓸모있는 책’들의 세상에서 돈키호테가 풍차에 결투신청을 하며 비장하게 던졌던 기사의 긴 장갑처럼 터무니없고 용감해 보인다. 쓸모없기가 이루 말할 데 없는, 하지만 신열에 달뜬 눈에 비치는 신기루처럼 아름다운 이 책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과 함께 훌륭한 외국 문학작품을 좋은 번역으로 꾸준히 소개해주고 있는, 책세상 문고 외국문학의 최신간이다. 어느 젊은 비극 배우가 사육제의 가면무도회 행렬 속에서 환상의 공주 브람빌라를 보았다고 믿게 되면서, 이상 속의 여인을 만나기 위해 가짜 코와 안경을 쓰고 스스로를 조롱하며 우스꽝스러운 꼬락서니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등 온갖 광기어린 행각을 벌이는데, 그 과정 속에서 해학의 참된 의의가 드러난다. 예술과 삶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는, 기괴한 책 <브람빌라 공주>는 근대 환상소설의 대가인 E.T.A. 호프만의 최고 걸작 중 한편으로서 예술과 삶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다. 바흐친의 통찰처럼 일상이 뒤집히고 억압된 욕망이 불거져나오면서 온갖 불가해한 일들이 벌어지는 사육제의 들뜬 분위기 속에 우리 자신도 모르는 내면의 자아가 모험을 떠난다. 가면과 춤, 음악과 난장, 무의미한 말장난과 장난 같은 마술의 미학. 상상력의 쾌락과 해학을 찬미하며 ‘합리적 사고’와 ‘이성’을 신봉하는 경직된 독일 비극에- 그리고 젠체하는 세상의 모든 서사장르에- 반기를 든 이 책은 야콥 칼로의 판화가 보여주는 어지러운 환상의 밤 속으로 뛰어들어, 우리에게 꿈처럼 낯설고 총체적인 ‘미적 체험’을 들이민다.

책에는 자고로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 비장하고 진지한 비극을 사랑하고 윤리적 교훈을 찾는 이들은 사악한 조롱과 장난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을 피해야 할 터. 오묘한 이미지들은 냉철한 분석을 불허하고 플롯은 논리를 철저히 거부한다. 하지만, 인간이란 자고로 꿈꾸는 동물이라고 믿는 당신이라면. 직관과 상상력이 이성과 합리보다 매력적이라고 믿는 당신이라면. 잘 다듬어진 언어의 아름다움은 환상적인 공감각적 체험을 가능케 하며, 그 체험은 그 자체로 가슴 두근거리게 기꺼운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당신. 세상의 젠체하고 진지한 사람들을 큰 소리로 비웃어주고 싶은 당신이라면, 이 가을 사고는 직관을 파괴한다고 당당히 선언하는 <브람빌라 공주>의 도전장을 받아들여보면 어떨까. 다만 소설이 끝날 때까지 ‘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라는 질문만은 유보할 것. 장담컨대 별로 쉽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브람빌라 공주> E. T. A. 호프만 지음 / 곽정연 옮김 / 책세상 펴냄]

김선형/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