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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양의 커밍아웃, 그리고 <드랙퀸 가무단>
2004-10-13

해영해준의 뒤집어보기 엎어보기 - <드랙퀸 가무단> Splendid Float

편의상 K라고 하자. 방콕 여행 마지막날, 나는 일행들과 함께 한국인이 운영하는 드랙퀸 클럽에 들렀다. 작고 허름한 클럽에 내가 막 들어섰을 땐 쇼가 시작되려던 찰나였다. 도저히 무대 쪽으로 비집고 들어설 수 없었던 나는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무대 위에는 커다란 꿩털을 머리에 꽂은 드랙퀸이 뒤돌아 서있었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패티김의 <못 잊어>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뒤를 도는 순간. 믿을 수 없었다. 놀랍게도 그 아름다운 뒷모습의 주인공은, K였다.

K는 내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별로 특징 없던 그가 갑자기 매우 특별해진 사건은 어느날, 2학년 초여름 자율학습시간에 일어났다. 갑자기 K는 칠판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건 그는 걸어나가 교탁에 버티고 섰다. 침을 세 번 꼴깍, 꼴깍, 꼴깍. 한번 더, 꼴깍. 하더니 K는 다짜고짜 '사실은 자신이 여자'라고 말했다.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학생들은 술렁였고, 선생들은 회의를 했다. 그로부터 몇 주. K는 선생들과 싸우고 친구들과 싸우고 부모와 싸웠다. 선생들은 K가 사실은 남자라고 했고, 아이들은 K가 여자라고 했다. K는 침묵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끝난 후, K는 사라졌다. 소문은 꼬리를 이었지만, 그 꼬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런 K를, 방콕에서 만난 것이다. <못 잊어>가 절정에 다다랐다. 감동적이었다. 브라보. 멋진 쇼였어. 나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쇼를 끝내고 진토닉을 마시고 있는 K에게 다가갔다. 이게 몇 년만의 해후란 말이냐, 친구. - 하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가까이 가서 다시 보니 그는 K가 아니었다. 무대에서 볼 때 보다 훨씬 주름이 많은 30대 후반의 대만인이었다. 그래도 멋진 쇼였어요, 건배나 한 번. 짠.

물론 K가 드랙퀸이 되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최소한 그들이 내가 목격했던 K만큼의 확신과 치열함으로 지금의 모습을 쟁취했으리란 사실만은 명증하다. 힘겹게 성취한 결과물은 언제나 타고난 것보다 아름답다. 오늘의 선택은 <드랙퀸 가무단>.

이해준(시나리오 작가 <품행제로>·<안녕! 유에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