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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맛바람 계곡의 아줌마?
2001-02-01

딸들과 함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본 아줌마의 반성

겨울시즌에 아이들이 볼 만한 영화가 여러 편 쏟아져나온 건, 아줌마로서는 다행이었다. 영화보기는, 남한테 뭘 가르치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거니와 자식교육에는 더더욱 소질없는 아줌마가 딸들한테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교육적 배려’였던 거다. 그래서 추위와 눈발을 헤치고 애들을 끌고 다니면서 <치킨 런>도 보고 <그린치>도 보고 <포켓몬스터>도 보고 오늘의 얘깃거리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도 보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취학 전 어린이들에게는 확실히 좀 어려운 영화였던 것 같다. 영화 보는 내내 딸들의 질문공세에 시달려야 했는데, 후반에 접어들면서 질문의 주종은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어?”로 바뀌었다. 아줌마 자신은 영화에 몰입해 있었으므로,스무 번째로 “아직 멀었어?”를 묻는 둘째 딸래미 머리를 쥐어박았는지 험상궂게 째려봤는지 어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그때가 영화의 클라이맥스, 그러니까 오무들이 황금빛 촉수를 모두어 죽은 나우시카를 되살려내는 황홀한 장면이 한창 스크린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줌마쪽에서 약간의 폭력적인 제압행위를 했을 개연성은 있다). 어쨌든 우리말 더빙이 된 <포켓몬스터>를 볼 때 아이들이 보인 열화와 같은 반응을 생각하면, 애들이 지루해 한 이유는 엄마와 영화 취향이 달라서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그렇다면 아줌마는 왜 아이들을 데리고 <…나우시카>를 보러 갔을까? 우리말 더빙이 돼 있지 않다는 건 사전에 알았고, 그렇다고 핵전쟁이나 환경파괴, 인류의 구원 따위 어려운 개념을 예닐곱살짜리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줄 자신도 없으면서(다행하게도, 착하게 굴지 않으면 혼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아줌마의 효녀들은 기껏해야 “오무는 왜 그렇게 눈이 많아?” 정도의 간단한 질문만 했다. 그 정도의 난이도 앞에

서도 아줌마는 쩔쩔 매면서 기껏해야 “응, 만화니까 그래!”라는 무식하고 무성의한 대답밖에는 못 내놓지만).

그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니까? 심오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니까? 그림이 예쁘니까? 분명한 건, 아줌마는 아이들이 극장에서 그런 수준 높은 애니메이션을 본다면 좋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런데, 한번 스스로에게 그 이유를 묻기 시작하니까, 점점 더 대답하기가 어려워졌다. 뜻도 모르고 봤다 하더라도 그 아름다운 영상만으로도 아이들한테는 안 본 것보다는 나은 것일까? 그렇다면 그건 왜 그렇지? <포켓몬스터>는 아이들이 졸라서 마지못해 보여주었고, <…나우시카>는 아줌마가 골라서 보여준 영화였다. 그 두 영화의 관람체험이 아이들에겐 어떤 질적 차이가 있을 것인가?

지난 가을,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교예단 공연을 보러 갔던 일이 생각난다. 관람료는 좌석당 물경 7만원이었는데, 아이들한테 좋은 문화경험이 될 거라는 확신 아래 아낌없이 돈을 지불하기로 했다. 그런데 큰딸은 공연 초반에 드르렁 쿨쿨 잠들어버렸고, 둘째딸은 중반 접어들자 몸을 비틀기 시작했던 거다. 시종일관 박수치고 눈물 콧물 흘려대면서 아이들한테서도 그에 상응하는 열광을 기대했던 아줌마는 딸들의 이런 교양없고 돈 아까운 줄 모르는 배신행위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어린 딸들과 냉전을 벌이며 분을 삭여야 했다. 분단이나 통일이 뭔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평양교예단’이라는 이름과 그들의 묘기가 살아 있는 피카추의 그것 이외에 또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은, 당시에는 들지 않았다.

<…나우시카> 얘기로 돌아가서, 화면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취학 전 아이들이 뜻도 모르고 보기에는 상영시간 두 시간이 너무 길다는 걸, 당시에 아줌마는 인정하지 않았다. 줄거리를 이해하고 보는 <…나우시카>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보는 <…나우시카>는 완전히 다른 영화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래가지고서야 좋은 거라면 억지로라도 먹이고 보는 ‘치맛바람 계곡의 아줌마’밖에 더 되겠나.

아니, 이렇게 반성할 자유라도 있으니 지금은 사정이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3월이면 학부형이 되고,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치맛바람 계곡으로 등떠밀리게 될 것이다. 20년 만의 폭설이 아무리 덮고 또 덮어도, 아줌마의 눈에 비치는 세상이 조금도 아름다워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최보은/ 아줌마choib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