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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추억 - 아주 오래된 친구 혹은 연인을 떠난 뒤
2004-10-10

“아, 부산분이셨구나...” 모두들 그렇게 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그곳에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해도, 사투리의 흔적이 꼬리뼈보다 더 희미하게 남아있다 해도 나는 늘 ‘부산분’ 혹은 ‘부산애’였다. 도착지가 어디라고 해도 출항지는 늘 같았다. 삶이란 것이 마치 돌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 처럼 보였다. 매년 가을에 열리는 부산영화제로 가는 일 역시 남들에겐 여행이었겠지만, 나에겐 습관적인 귀향(歸鄕)이었다. 축제에 대한 설레임보다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더 컸다. 영화제 데일리팀의 고정멤버로 참가했던 몇해동안, 한때 ‘찌찜’과 오징어볶음을 사먹던 길 위에서 감독과 배우들을 만나고, 여고창문 넘어 보기만 했던 고급호텔에 들어가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극장앞 패스트푸드점의 점장이 되어 있는 동창을 만나 후렌치후라이를 공짜로 얻어먹기도 했고, 동네를 관할하는 형사가 되었다는 든든한 친구과 마주치기도 했다. 어쩌면 남포동 밤거리를 배회하는 ‘어둠의 자식들’이나 치렁거리는 금목걸이를 차고 항구를 주름잡는 조폭중에도 동네친구가 있었을 것이다. 1년에 한번 쯤 만나도 늘 변함없는 친구, 언제라도 거기에 있을 것 같아서 더 이상 설레지도 염려되지도 않는 연인, 나에게 부산은, 부산영화제는 그랬다.

그러나 올해 초 잠시 한국을 떠나야 겠다고 결심했던 순간, 가장 큰 망설임을 안겨준 존재는 의외로 친구도 연인도 아니었다(사실 내가 없다 해도 열심히 그들의 삶을 꾸려나갈 이들에 대한 걱정은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10월이면 열릴 부산영화제였다. 습관과도 같은 귀향길이었다. 뉴욕행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몇년을 기다린 의 호텔방문을 열지 못하고 온것을,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연처럼 비상하던 그 소녀가 <하나와 아리스>에서 토슈즈를 신고 춤추는 것을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부산영화제가 시작되기 며칠 전인 10월 1일부터 이곳에서는 뉴욕영화제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타인의 취향>을 만든 아네스 자우이의 <룩 앳 미>를 개막작으로 알모도바르의 <나쁜 교육>, 허우 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같은 영화들이 줄줄이 상영되는 업타운의 링컨센터 앞에서, <천국의 문>의 무삭제판부터, 희귀한 무성영화, 국적, 장르를 불문한 다양한 영화들을 볼수있는 시네마테크로 둘러싸인 이 영화의 도시 한복판에서, 나는 지금 누구보다 사무치게 부산영화제를 그리워하고 있다. 어떤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는가는,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는지는 그들을 떠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증명되기 마련이다. 결국 모든 여행은 좀더 의미있는 귀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나는 집으로부터 훨씬 더 멀리 떠나와 있다. 하지만 왜, 어떻게 돌아가야하는 가에 대한 대답과는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다.

백은하(<씨네21> 뉴욕통신원, <우리시대 한국배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