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트시네마, 9월30일부터 두번째 ‘시네-랑데부’전 상영
랑데부라는 단어는 얼마만큼 미래진행형의 설렘을 동반하고 있는가. 시네-랑데부, 혹은 새로운 영화와의 만남. 지난 9월1일부터 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렸던 첫 번째 ‘시네-랑데부’는 호기심에 찬 많은 관객에게 할 하틀리와 오타르 요셀리아니, 브루노 뒤몽,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들을 기쁘게 선사하였고, 오는 9월30일부터 10월12일까지 그 두 번째 종합선물 패키지를 준비 중이다. 세계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동시대 시네아스트를 소개한다는 취지하에 이번에는 이시이 소고의 <엔젤 더스트>와 짐 매케이의 <우리들의 노래>를 포함하여, 90년대 중반 이후 프랑스 현대영화의 어떤 경향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8편이 마련되었다. 가스파 노에, 로랑 캉테, 이시이 소고, 장 피에르 리모쟁, 엘렌느 앙젤, 안느 소피 비로, 짐 매케이, 필립 그랑드리외라는 비교적 낯선 이름들이 줄줄이 호명될 이번 영화제를 통해, 결코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차가운 시선으로 우리의 삶을 응시했던 용기있는 젊은 작가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시네랑데부: 새로운 영화와의 만남>
일시 9월30일(목)~10월12일(화) 13일간
장소 서울아트시네마
주최 (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후원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상자료원
문의 02-720-9782, www.cinematheque.seoul.kr
제공 (주)퍼시픽엔터테인먼트
엔젤 더스트 Angel Dust l 이시이 소고 l 1994년 l 116분80년대 일본 독립영화계에 반항적인 펑크의 기운을 불어넣었던 장본인 이시이 소고의 웰메이드한 심리스릴러. 매주 월요일 저녁 6시, 퇴근길의 피곤한 직장인들로 가득한 도쿄 지하철 내에서 젊은 여자들이 죽어간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독약이 묻은 침에 찔려 살해당한 여자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다. 미궁에 빠진 사건 해결을 위해 투입된 범죄심리학자 세츠코는 옛 애인이자 심리학계의 이단아 아쿠 레이가 여기에 연루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마인드 컨트롤, 세뇌, 과대망상증, 이단종교, 양성인간 등 세기말 일본을 감싸고 있는 온갖 기분 나쁜 징후들이 이곳저곳 출몰하면서 비현실적이리만치 세심하게 조율된 도쿄의 미래적인 룩(look)과 겹쳐지고, 점차 악몽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으스스한 아우라에 관객이 빠져들게끔 한다. 이시이 소고의 여타의 영화보다 훨씬 스타일리시한 이미지와 세련된 사운드를 과시함에도 불구하고 <역분사 가족>이라든가 <꿈의 미로>에 환호했던 관객이라면 예전의 그 활력이 대부분 삭제되어 있다는 점에 아쉬움을 느낄 듯.
아이 스탠드 얼론 Stand Alone l 가스파 노에 l 1998년 l 93분아마도 이 데뷔작에 비한다면 가스파 노에의 최근작 <돌이킬 수 없는>은 장난 정도로 치부되어야 할 것이다. ‘만인을 향한 투쟁’이라는 원제의 <아이 스탠드 얼론>이 발표되자마자 가스파 노에는 <검모>의 하모니 코린과 더불어 ‘퍽큐 시네마’의 선두주자가 되었으며, 정제되지 않은 사악한 분노를 직접적인 쇼크의 연속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관객을 끊임없이 도발시켜왔다. 때는 1980년 프랑스. 어린 딸을 희롱한 남자를 죽인 전직 말 도살업자는 몇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가게는 이미 아랍인에게 넘어갔고 끔찍한 불황에 시달리는 친구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남자를 거부한다. 세상을 향한 증오를 나치와 프랑스 정부와 유색인종과 동성애자와 탐욕스런 여성들에게 돌리는 남자는 총 한 자루와 함께 그 모든 것에 대항하기로 마음먹는다. “내가 나빠져야 한다면 나빠질 것이다. 정말로 나빠질 것이다.” 무지막지한 무정부주의적 선동이 쉴새없이 난무하는 와중에 관객은 점점 주인공의 분노에 감염되거나 혹은 지독한 혐오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중 어느 쪽이든 도저히 잊기 힘든 강렬한 체험이 될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
도쿄 아이즈 Tokyo Eyes l 장 피에르 리모쟁 l 1998년 l 95분<도쿄 아이즈>는 지난해 소개되었던 리모쟁의 또 다른 작품 <노보>가 보여주었던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시키고 있다. 포화 상태에 이를 정도로 프레임을 꽉꽉 채우는 편집증적인 비전, 강렬한 테크노 사운드의 자극, 어디까지나 관념에 그치는 바람에 살아 있는 인물들로 느껴지지 않는 일군의 캐릭터들. 하루의 대부분을 비디오 게임과 테크노 음악, 행인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소일하던 외로운 소년이 어느 날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거리로 나가, 어지러운 시야에 비치는 것에 닥치는 대로 총을 쏘기 시작한다. 곧 호들갑스런 언론에 의해 소년에게는 ‘4개의 눈’이라는 별명이 따라붙고, 이 미지의 킬러를 조사 중이던 경찰 로이의 여동생 히나노는 ‘4개의 눈’에게 매혹된다. <도쿄 아이즈>는 일본과의 합작을 통해 세기말 도쿄에서 일어나는 청춘의 혼돈과 방황을 다루고 있다. 리모쟁은 철저하게 자신이 방관자적 시각을 취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결국 영화는 그다지 흥미롭지 못한 피상적인 관찰기록이 되고 말았다.
솜브르 Sombre l 필립 그랑드리외 l 1998년 l 112분<미녀와 야수> 혹은 그림 형제의 동화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버전.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에 몰두하던 필립 그랑드리외의 장편 데뷔작 <솜브르>는 발표 즉시 격렬한 찬반논쟁에 휩싸였다. 별 이유없이 여자들을 유혹하여 강간 살해하는 연쇄살인범 장은 어느 날 지독하게 외로워 보이는 여자 끌레르와 마주친다. 끌레르는 장이 여자들을 위협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그의 정체를 눈치채고도 자발적인 의지로 그의 곁에 머무른다. 그녀는 그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자신의 억제할 수 없는 충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끝없는 수평 트래킹으로 이어지는 풍경 숏들이 쉴새없이 흔들린다. 오브제의 윤곽선은 뭉개지고 단지 명암으로 간신히 구분되는 덩어리로 제시된다. 둔탁한 소음과 기괴한 음향들이 이미지의 불투명한 선 위에 겹쳐지면서, 영화의 이미지는 마치 인상주의 화풍의 아방가르드 버전처럼 되어간다. 연쇄살인범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듯한 기이하고 암울한 비전, 부인할 수 없는 매혹적인 미감과 윤리의식 사이에서 불편하게 엉거주춤 머무르게 하는 지독하게 사악한 영화.
인력자원부 Human Resources l 로랑 캉테 l 1999년 l 100분파리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는 프랑크는 졸업을 앞두고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가 30년 동안 근무했던 공장의 관리자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 늙은 아버지는 똑똑한 아들이 못내 자랑스럽다. 근로자들의 복지와 인사 관련 업무를 맡게 된 프랑크는 자신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주당 35시간 근무제가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게 하는 시스템임을 깨닫고 번민한다. 육신 자체가 기계화되어버린 늙은 노동자 아버지와(그는 끊임없이 ‘나의 기계’라고 표현하며 자신이 다루는 기계를 어루만진다) 아버지와는 또 다른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화이트칼라 아들 사이의 고통스런 딜레마를 통해, ‘인력 자원’이 어떻게 냉엄한 현실하에서 별다른 해결없이 착취당하는가를 고발하는 작품. ‘인간이 가족이나 직장 같은 사회집단 속에서 노동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정의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결코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려나가는 로랑 캉테의 연출력이 뛰어나다. 그는 90년대 중후반 자족적인 개인적 판타지에 머무르던 프랑스 영화계에 다시금 ‘공적 영역’으로의 관심을 환기시킨 경향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인간의 피부, 짐승의 심장 Skin of Man, Heart of a Beast l 엘렌느 앙젤 l 1999년 l 94분1999년 로카르노영화제 금표범상 수상작. 순진한 아이들의 시선으로 어른들의 끔찍한 세상을 묘사하는 일련의 전통하에 놓여 있는 <인간의 피부, 짐승의 심장>은 그에 더해 소녀들의 성장이라는 예민한 토픽을 첨가시키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매혹적인 연출력을 보여준다. 아내가 도망간 뒤 어린 두딸과 함께 살고 있는 형사 프랭키는 업무상 과실로 징계를 받고 고향에 내려온다. 두 자매, 오렐리와 크리스텔은 다정한 할머니와 얌전하고 수줍은 막내 삼촌 알렉스와 함께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런데 어느 날 15년 동안 행방불명이었던 둘째 삼촌 코코가 돌아오면서 잔잔했던 일상에 균열이 발생한다. 아름답고 정적으로만 보였던 이 작은 산간마을에 점차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문과 악몽이 풍경의 표면 위를 떠돈다. 마을의 늙은 사내들은 프랑스 현대사의 수치라 할 수 있는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고, 프랭키 형제들 역시 친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기억으로부터 어떻게 해방되고 구원받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내들은 점차 파국으로 치닫지만, 그 틈새에서 어떻게든 자라나야 하는 소녀들은 아버지를 밀쳐내고 디바인 코미디의 노래 〈Tonight We Fly〉에 맞춰 전력질주하며 고함을 질러댄다. 이번 영화제 중 최고의 필견작.
소녀들은 수영을 못해 Girls Can’t Swim l 안느 소피 비로 l 1999년 l 101분해마다 여름방학이면 절친한 친구 그웬이 사는 브르타뉴 해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던 리즈가 올해에는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한없이 친구를 그리워하던 그웬은 마을 건달들과 어울리며 이성에 눈뜨게 되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방황하던 리즈가 몰래 그웬을 찾아오며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이 발생한다. 남성의 부재, 혹은 남성에 눈뜸이 소녀들에게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는가? 영화는 10대 소녀들의 예민한 감각을 십분 활용하여 지극히 정밀하게 그녀들의 일상을 훑어내다가 불현듯 차갑고도 충격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카트린 브레이야가 클로드 샤브롤을 만났을 때 바로 이런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우리들의 노래 Our Song l 짐 매케이 l 2000년 l 96분뉴욕 브루클린 다운타운에 위치한 고등학교에서 ‘잭키 로빈슨 밴드’ 부원(일종의 역동적인 고적대라고 하면 될까?)인 라니샤와 마리아, 조슬린은 곧 다가올 음악 대회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연습이 끝나면 셋은 함께 한여름의 브루클린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자신들의 사소한 일상에 대해 쉴새없이 수다를 떤다. 하지만 올해의 여름은 임신과 질병 등 ‘그 동네에 사는 아이들’에게는 별로 낯설지도 않은 몇몇 사건들로 인해 위기의 시간으로 다가온다. 다양한 뮤직비디오 작업을 통해 음악과 몸짓, 스타일에 관한 탁월한 감식안을 보여왔던 짐 매케이가 신중한 오디션을 통해 발탁한 신인배우들의 일상적인 연기, 그리고 실제를 방불케 하는 ‘잭키 로빈슨 밴드’의 열정적인 연주,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를 연상케 하는 다채로운 정공법적 묘사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브루클린 지역과 거기 사는 십대들의 삶에 숨김없는 애정을 표현하는 매케이의 소박한 진심이 전해지는 작품.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