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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안민수 교수와 한양대 최형인 교수가 말하는 제자, 제자들이 말하는 스승

연기파 배우들이 꼽은 ‘우리들의 스승’

관객 1천만 시대의 한국영화에 두 개의 큰 배우 산실이 있다. 나비가 태양과 비와 어미의 사랑으로 우화하듯이, 그들에겐 ‘교실’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설경구에겐 최형인이란 교수가 있었다. 일주일에 네 시간을 몰아서 하던 최형인의 연기 실습 수업은 살풀이굿의 무당처럼 쉴 틈 없는 고함과 ‘구타’와 울음이 있었다고 한다. 넓은 강당을 전율케 한, 30대 후반의 여성의 에너지는 연출을 마음 먹었던 설경구의 목표를 결정적으로 연기로 바꾸어 놓았다. 그때 그가 최 교수로부터 귀 따갑게 들었던 말. “턱 움직여! 아래턱 없어?”

10여년 뒤 설경구가 처음 주연을 맡은 <박하사탕> 포스터에, 두 손 들고 서서 “나 돌아갈래”를 외치는 그의 벌어진 턱은 찢어질 것만 같다. 최 교수에겐 이 포스터가 남달라 보였다. “저게 나 보라고 저렇게 찍었나….”

동국대 연극영화과 81학번엔 최민식이란 학생이 있었다. 먹는 술이 강을 이루는 질풍노도의 그에게도 두려운 존재가 있었으니 안민수라는 콧수염 선생이었다. 안 교수는 화내거나 고함치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학생들의 연기를 지켜보다가 냉정한 어조로 “그거, 아니야”라며 한마디 할 때, 그 지적의 정확함엔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안 교수가 자주 하던 말은 ‘릴렉스’. “힘을 빼라고. 야구든 골프든 스윙할 때 힘을 빼야 멀리 나가. 연기도 마찬가지야. 더 세게 전달하려고 할수록 스스로 더 풀어.”

20년 가까이 지나 <쉬리>가 나왔을 때 최민식을 두고 ‘한국의 게리 올드만’ 등등의 칭찬이 쏟아졌다. 그러나 안 교수는 달랐다. “민식이, 힘을 빼라고.” 한국 영화를 이끄는 명실공히 톱스타들에게도 ‘핏덩이’ 시절은 있었다. 그들의 ‘수업시대’를 거슬러 돌아가면 눈물의 무대의 뒤에, 혹은 좌절의 인생 모퉁이에서 그들을 부축하고 있는 스승들의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80년 동국대 교단에 섰다가 지난해 정년퇴임한 안민수 교수의 제자는 최민식, 한석규, 김상중, 박신양, 이미연, 유준상, 김혜수, 채시라, 고현정 등으로 이어진다. 84년부터 한양대에서 교편을 잡은 최형인 교수는 이경영, 권해효, 유오성, 설경구, 이문식 등을 가르쳤고 학교와 관계없이 이미 기성배우가 돼있던 이영애, 이정재, 이은주, 임은경의 개인교사였다. 두 교수 모두 미국 유학파이지만 연기를 가르치는 스타일은 달랐다. 제자들의 말을 빌려 안 교수가 객관적, 분석적인 쪽이라면 최 교수는 학생과 열정적으로 교감하는 쪽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들의 영향이 제자 배우들에게 남아 연기에 반영되고 있을 터. 두 교수와 제자들이 들려주는 연기의 세계를 따라가본다.

동국대 안민수 교수의 연기수업이란 “민식이, 힘 좀 빼라고!”

정서적인 것이든 이성적인 것이든 그걸 표출하지 못하게 막는 저항요소를 제거해 주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교육과 관습, 버릇에 억눌려 느끼지 못하고 표현도 못하게 된다. 그걸 벗겨주는, 아니 스스로 벗어던질 수 있도록 해주는 작업이다. ‘이걸 해라’가 아니라 ‘이런 걸 없애라’, ‘이런 게 네 안에서 저항하고 있지 않냐’ 그걸 집어주는 거다.

표현은 논리적 과학

안민수 교수가 80년 동국대 교단에 서면서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한 건 시간 지키기였다. “술 먹고 늦게 오고…. 연기를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학생들에게 없는 것 같았다. 첫째도 시간, 둘째도 시간, 세째도 시간이라고 누차 강조했다.” 제자들에 따르면 그는 또 흐트러져 있는 걸 싫어했다. 밤새 술먹고 온 사실이 적발된 학생들은 “니들, 다 가라” 소리를 듣고 나가야했다. 그때 쫓겨났던 최민식은 술을 좋아하면서도 촬영 앞두곤 술 먹지 않는 게 습관이 됐다.

안 교수의 지론은 ‘연기는 곧 과학’이다. “연기는 진선미의 요지경이다. 요지경이라는 장난감처럼 여러 색이 반사돼 형형색색의 모양을 만들어내지만 그게 다 과학이다. 반사의 되풀이로 이뤄지는 필연이다.” 동랑 유치진 선생의 사위이기도 한 안 교수는 학교 다니면서 연극배우를 하다가 하와이 대학으로 유학가서 연출을 공부했다. “솔직히 난 연기는 안 되겠다 싶었다. 흉내내고 모양을 낼 순 있지만 정말 감동을 주는 훌륭한 배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72년 귀국한 뒤 연극연출을 시작해, 77년 한국 연국으로는 처음으로 미국과 유럽 순회공연에 나섰던 <하멜태자>를 연출했다. 그러나 순회공연을 다녀온 뒤 다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역시 기초가 단단해야 한다. 동네축구처럼 해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를 가르치기 시작한 건 그에게 “이전의 작업이 뭐가 잘못 됐는지를 스스로 환기해간다”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그런 만큼 안 교수의 수업은 체계적, 논리적이었다. “우선 준비단계로 몸과 마음을 다듬는 거다. 자세를 바로 잡고, 몸의 굳어진 곳을 풀고, 한국말을 바로 하게 하고. 이걸 제대로 해야 한다. 조급하게 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 다음에 △작품 구성과 캐릭터 분석 △연기의 양식과 기술 △실제 작품 출연 순으로 가르쳤다. 학생들끼리 연극을 연출할 때 안 교수는 연습과정을 죽 지켜보다가 한마디씩 하는데, 최민식에 따르면 그 짧은 한마디가 만병통치약이었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를 연습할 때였다. ‘민식이, 이거 셰익스피어 아니야, 왜 혼자 비극하고 있어.’ 그 말로 모든 게 풀리는 거였다.”

안 교수는 제자들이 출연한 연극 공연이나 영화 시사회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지난해에 정년 퇴임하고 명예교수로 대학원 연기이론 한 과목만 강의하고 있다. “어떻게든 제자들 작품은 보러 가자. 내가 가르치는 건 보러다니는 일이다. 특별히 뭘 지적하지 않아도 영화 끝나고 차 한잔 할 시간이 생기면 그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들에게 영감을 계속 줄 수 있다면 그런 방식일 거다.”

제자들

최민식은 처음부터 눈에 띄었다. 가끔 좀 릴렉스 하면 어떨가 하는 욕심이 있다. 박신양은 계속 생각을 해서 뭔가를 만들어낸다. 머리를 쓰다듬는 식의 동작 하나하나를 다 계산해서 한다. 그럴 땐 ‘그거 빼고’ 하면서 그걸 좀 줄여주면 연기가 된다. 유준상은 열심히 하기로 치면 동국대 챔피언이다. 한석규는 소중한 걸 타고 났다. 소리가 미성이다. 또 학교 때부터 지적이었다.

외국 배우 한명을 꼽는다면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과 <오델로>를 학생들에게 꼭 보여준다. 같은 배우이지만 두 작품에서 완전히 달라지지 않는가. 존 웨인은 어떤 영화에서도 존 웨인같다. 물론 존 웨인도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로렌스 올리비에이다.

제자들이 말하는 안민수 교수 몸 함부러 굴리지 마라 ‘불호령’

최민식 졸업 공연 하루 앞두고 술 마시다가 급성폐렴에 걸려 공연을 못하게 됐다. 그때 안민수 교수에게 야단맞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배우는 몸이 악기다. 피아니스트가 손가락을 얼마나 아끼느냐. 배우라고 예술을 빙자해 몸을 함부러 놀리면 안된다.” 또 <파이란> 사시회에 왔다가 대충 입은 내 옷차림을 보곤 한마디 했다. “배우는 멋이 있어야 한다. 자유롭게 입어도 멋스럽게 해라.” <올드 보이> 시사회 뒤엔 모처럼 “술 살 테니 친구들을 불러라”고 했다. 정이 많은 분이다. 좋은 선생님을 모셨다는 자부심에 늘 행복하다.

벽 부딕칠때 마다 선생님 마음 품어

박신양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학생이었다. 연기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인데, 선생님에게 “식사하셨어요?” 같은 말도 못했다. 하지만 무대에서는 나를 솔직히 털어놓았고 선생님도 애정어린 지도를 해주셨다. 사제지간이 그렇게 만들어지는구나. 연기를 배우는 건 기술을 배우는 게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걸 배우는 게 아닌가. 러시아로 유학 다녀온 뒤에는 직접 배우지 않아도 선생님을 마음에 품고 문제를 만날 때마다 기준을 가질 수 있을 것같아서 일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내가 일을 하는 데 선생님은 절대적 존재이다.

“기초에 충실하라”며 ‘권총’ 주셨죠

김혜수 굉장히 완고하고 깐깐하고 특히 연기자들에게 기초적인 것들을 중시하셨다. 나는 학생 때도 촬영 때문에 수업 빠지는 일이 많았다. 선생님은 세번 빠지면 에프를 줬는데, 마침 <한지붕 세가족> 녹화가 선생님 수업과 겹쳤다. 녹화 끝나는 대로 달려와 교실 문 앞에 서면 들어가기까지 5분 이상 망설였다. 워낙 경건한 분위기의 수업이어서 늦게 들어가기 너무 미안했다. 결국 에프 맞고 재수강했지만 선생님은 애정을 가지고 제자들을 아끼신다. 그때 바빠서 많은 걸 얻지 못해 아쉽다. 요즘은 연극영화과도 많아졌지만 선생님은 변함없이 특별한 교수이시다.

한양대 최형인 교수의 연기수업이란 “경구야, 아래턱 없니?”

자신을 되찾게 해주는 거다. 자신의 중앙이 확실하면 배역을 거기로 가져와서 표현을 한다. 대다수 배우들이 자기 중심을 못 가지고 있다. 그걸 찾아주는 것, 즉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찾아주는 거다. 어쩌면 배우보다 연기 선생이 더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같다. 본능적 집요함과 에너지가 있어야 하고.

내면의 벽 깨기 닦달

최형인(55) 교수는 대학 시절 연극할 마음으로 유학을 떠나선 불어, 공연 이론을 배우고 나서야 뉴욕대에서 연기를 공부했다. 그렇게 7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국내 언론은 그를 ‘연기유학파 1호’로 불렀다. “외국에서 연기를 공부하는 건 언어 문제 등등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내가 가르치자고 생각했다.” 그는 84년부터 한양대에서 국내에 전무했던 방식으로 연기를 가르쳤다. 학생들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방어벽을 허물고자 구석에 몰아넣고 닦아세웠고 때리기도 예사였다. 학생이 눈물을 흘리면 무너졌다는 뜻. “그 상태로 연기해”라고 몰아부쳤고 최 교수도 종종 같이 울었다. 설경구는 그 수업이 “충격이었고 대학같지가 않았다”고 했다. 데모 많이 하던 시절, 여학생들이 군복바지를 입기도 했다. 그러면 최 교수는 “미니 스커트 입고 화장도 짙게 해라”고, “못 했던 걸 해보라”고 시켰다.

그는 학생들의 과거 상처를 캐내는 데도 선수였다. 벽을 깨려고 한 일이지만, 그는 관찰이 정확해서 ‘점쟁이’로도 불렸다. “학생들이 먼저 사인을 보내는 거지. 너 왜 이렇게 동작이 굳었어? 니네 아버지 군인이야? 그러면 ‘어떻게 아셨어요’ 하는 식으로. 그런데 애정을 가지고 보면 실제로 보여.” 한양대 출신인 홍석천은 최 교수의 수업 때 이런 식으로 다그침을 당하다가 “나는 남자가 더 좋아요”라고 커밍아웃한 사실을 신문컬럼에 쓰기도 했다. 그 글에서 홍석천은 최 교수를 자기 인생의 사람으로 추켜세웠다. 얼마전부터 최 교수의 수업스타일도 바뀌었다. “기운이 있어야 때리지. 지금은 벽이 있으면 어떠냐, 이 배역을 어떻게든 표현하면 되는 것 아니냐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래도 결국은 벽이 있으면 안 돼.”

최 교수의 연기수업은 한양대 제자와 그가 이끄는 한양레퍼토리 극단 배우들을 통해 소문이 퍼져나갔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찍기 직전 이영애가 그에게 개인교습을 부탁했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찍고 난 임은경도 그를 찾아왔다. 얼마전엔 곽경택 감독의 신작 <태풍> 촬영을 앞두고 이정재가 그로부터 개인교습을 받았다. 그러나 최 교수는 개인교습엔 한계가 있다고 했다. “연기 시작할 때부터 동고동락하며 가르치는 게 아니니까. 자기가 해온 방식 안에서 도움이 될 걸 찾아 접시에 담아서 주는 거지.” 이들과 달리 설경구, 유오성 등 한양대에서 4년간 배운 제자들의 공통점으로 최 교수는 ‘파워’를 꼽았다. “분위기를 팔지 않고 배역을 확실히 믿고 표현하는 것같긴 해.” <그 섬에 가고 싶다> 등 두 차례 영화 출연 경험이 있는 최 교수는 최근 <사과>에 문소리의 어머니 역을 맡아 촬영중이다.

제자들

이정재는 스스로 목소리와 집중력을 걱정해서 교습을 통해 이 둘은 많이 고쳤는데 한 순간에 감정을 토해내는 게 아직 약한 것 같다. 이영애는 속이 잘 안 보이는데 그게…. <친절한 금자씨> 앞두고 걱정을 많이 하는 것같더라. 이문식은 학교 때 운동권이어서 정치인될 줄 알았다. 나한테 많이 맞았고. 설경구는 얼굴 인상도 그랬고, 또 나대질 않아서 연기보다 연출할 줄 알았다. 요즘엔 배우 되더니 예뻐졌는데 자기를 자꾸 끄집어내리고 싶어한달까, 자기 인생을 그대로 느끼지 않고 에누리하려는 버릇 같은 게 지금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너는 찾아오지도 않냐, 나쁜 놈아!

외국배우 한명을 꼽는다면

케빈 클라인은 무겁지 않으면서 캐릭터를 선명하게 표현한다. 스스로 즐기고. 관객에게 “나 연기 잘하고 있어”라고 내세우는 것같지가 않다.

제자들이 말하는 최형인 교수 연출에서 연기로 나를 이끌어

설경구 최형인 교수가 아니었다면 연기에 그렇게 흥미를 갖지 못했을 것같다. 실습 때 앞에 나가긴 싫었지만 보는 게 무척 재밌었다. 최 교수가 포기했는지 나는 크게 잔소리 들은 게 없었고 워크숍 땐 턱 움직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대학 졸업 때 공무원 시험 보겠다며 연기를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최 교수가 두시간 동안 말렸고 그래서 유예기간을 얻었다. 결국 다시 연기를 하게 된 뒤에도 “숨 쉬어, 호흡해. 느낀 대로 그대로 바로 뱉어” 등등 최 교수의 말이 뇌리에 박혀 연기할 때 수시로 떠오른다.

유치장 찾아와 애정어린 충고

이문식 연기실습 때 나만큼 많이 야단맞은 학생도 없을 것같다. 87학번이라 시위에 나가느라 연기수업도 많이 빼먹곤 했다. 한번은 유치장에 갇혀있는데 최 교수가 경찰서까지 찾아와서 “네가 하고자 하는건 이해하지만 전공공부는 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면서 풀려날 수 있도록 도와 주셨다. 그리고는 오디션에 참가할 수 없었던 내게 연극영화과 30주년 재학생·동문 합동 공연에서 연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느껴서 말하고 느껴서 행동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 연기에 애를 먹는 후배들에게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된 것같다.

연구실을 자유공간으로 활짝

권해효“모범생이 되기를 포기해라.” 최 교수는 이십대까지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말의 정반대를 나에게 반복하곤 했다. 내 안의 강박관념과 틀을 깨기 위해 해준 말씀이었다. 선생이 귀국해 학교로 온 뒤 처음 맞은 학생들인 나를 포함한 85학번은 정말 복받은 학번이었다. 열정이 넘치던 선생은 술도 안마시면서 학생들과 밤새워 이야기하기를 즐겼고 당신의 연구실을 학생들의 자유공간으로 열어놓았다. 밤새 최 교수 댁에서 동기들과 이야기하며 놀다가 다음날 교수님 어머니가 차려주셨던 따뜻한 밥맛이 아직도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