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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인간극장’ 동행취재기
글·사진 김진철(한겨레 기자) 2004-09-07

출연자 함께 먹고자고‥자연스런 ‘일상’ 담아

지난 1일 오후 서울 은평구 역촌동 주택가의 한 가정집. 두 남자가 제 집인 듯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아 있다. 집 한 쪽에는 모녀로 보이는 두 사람이 거실과 부엌, 안방을 들락거린다. 이쯤 되면 누가 집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헷갈릴 정도다. 이야기를 해보고 나서야 알았다. 소파에 앉아있던 두 사람은 다큐 전문 제작사인 리스프로의 이상구 피디와 카메라맨 조문희씨였다. 이들은 <한국방송>의 <인간극장> 촬영을 위해 열흘째 이 집으로 출퇴근 중이었다.(우측 사진은 카메라맨 조문희씨가 노래를 부르는 윤경씨의 옆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찍고 있는 장면)

“기다리고 있어요. 가족들이 노래연습을 하신다고들 해서요. 원래 오후에 주인공인 윤경씨가 외국인과 영어회화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약속이 취소됐다고 하네요. 노래연습 끝나면 윤경씨와 어머니가 시장엘 들러 전시회에 가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따라다니면서 있는 듯 없는 듯 촬영해야죠.”

이들이 촬영 중인 것은 오는 20일부터 24일까지 방송될 ‘윤경이의 홀로서기’ 편. 초등학교 3학년 때 집에 불이나, 그 충격으로 ‘소리’를 잃어버린 청각장애인 이윤경(26)씨와 어머니 최익명(48)씨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이렇게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요. 가족처럼 친해져야 촬영이 되거든요. 그래서 좋은 프로그램이 나오냐 안 나오냐는 초반에 얼마나 출연자들과 친해지느냐에 달려있죠. 아이템을 잡으면 몇 달 전부터 자주 전화해서 계속 체크하고 찾아와서 취재하고 몇 시간씩 이야기를 듣죠. 윤경씨나 어머니도 제대로 마음을 연 지는 3~4일밖에 안 됐어요. 처음에는 문도 꼭꼭 닫고 다니고 부담스러워 하시고…. 촬영이 힘들었죠.”

콘셉트 잡고 촬영·편집한 작품 평균 3개월

이야기를 나누던 피디와 카메라맨의 움직임이 갑자기 바빠졌다. 윤경씨 어머니가 안방에서 딸 머리를 만져주기 시작한 것. 카메라맨은 6㎜ 카메라를 들고 안방 문 안팎을 오간다. 피디는 가끔 윤경씨 모녀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좋은 장면을 잡기 위해 몇몇 주문을 한다. 윤경씨는 청각장애인이지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윤경씨 어머니가 입 모양을 보고 소리를 ‘읽는’ 구화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경씨는 소리를 빼앗긴 10여 년 동안에도 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덕분에 윤경씨는 일반 중·고등학교를 거쳐 경기대 미대를 졸업했다.

▷ 불광대조시장 꽃가게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윤경씨 모녀. 6㎜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카메라맨 조문희씨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머리 손질을 마친 윤경씨와 어머니, 윤경씨의 남동생이 거실 한 쪽에 놓인 피아노 앞에 섰다. 건반을 치는 동생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모녀가 즐겁다. 띄엄띄엄 음정을 맞추는 윤경씨는 악보에 쓰여있는 가사와 노래 부르는 어머니의 입 모양을 보며 음정을 가늠한다. 밝은 표정이지만 노래 부르는 모습이 어딘가 힘겨워 보인다.

“소음이라도 좋으니까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어요.” 마냥 밝은 표정에 예쁜 미소만 머금고 있던 윤경씨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옆에서 함께 노래 연습을 하던 어머니도 더는 눈물을 참지 못 하고 처음으로 딸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시종일관 자리를 옮기며 앵글을 잡던 카메라도 잠깐 흔들렸다. 10여년 간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온 윤경씨의 아픔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가족처럼 친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2000년 5월부터 시작해 만 5년을 넘어선 휴먼다큐 <인간극장>은 항상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보통 3개월여 전부터 준비를 시작한다. 컨셉을 정하는 데 1달이 걸리고, 나머지 2달 동안은 제작·편집이 이뤄진다. 경우에 따라서 1~2년 걸릴 때도 있고, 아예 사전 취재 때 취소되는 경우도 있다. 5부작을 다 채울 만한 이야기가 없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정말 감동적이고 절절한 이야기가 있음에도 티브이 출연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 취재는 대개 5개 이상의 아이템을 두고 시작한다. 사전 취재와 수차례 회의를 거쳐 살아남는 아이템이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다.

3개월 여의 취재·제작 과정도 결코 쉽지 않다. 아이템을 얻는 것이 우선 어려운 일이다. 종합지부터 지방지까지 신문은 물론 잡지들도 가리지 않고 샅샅이 뒤져 1단짜리 작은 기사에서라도 실마리를 찾아 취재를 시작하고, 신문 잡지를 다 뒤져도 잡히지 않을 때는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을 통해 수소문 하는 ‘맨땅에 헤딩하기’도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아이템이 잡히면 보통 보름이 넘는 시간을 출연자들과 함께 먹고 잔다. 물론 촬영을 위해서 출연자보다 먼저 일어나고 늦게 자는 것은 기본이다.

▷ 윤경씨가 노래를 부르다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소음이라도 좋으니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순간 윤경씨의 더 깊은 내면이 카메라에 담긴다. 출연자 따라다니며 있는듯 없는듯 찍어

촬영 장비나 인원은 소규모로만 유지한다. 카메라맨과 피디 한 명씩에 6㎜ 카메라 한 대가 전부다. 그 이상의 스태프나 장비는 출연자들이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요즘 한참 주가가 오르는 브이제이나 카메듀서로 더 제작진의 수를 줄이지는 않는다. 카메라맨은 촬영에만 열중하고 피디는 좀더 넓은 시각으로 프로그램을 바라볼 수 있어야 더 좋은 다큐가 나올 수 있다는 원칙 때문이다.

그래서 인력도 많이 필요하다. 제작사인 리스프로와 제3비전을 합쳐 <인간극장>을 만들고 있는 피디가 모두 14명, 작가와 카메라맨은 각각 5명씩 붙박이로 있다. 그렇게 해서 카메라맨은 보통 1년에 12편, 피디는 6편을 찍는다. 제작 과정에서는 30분짜리 테이프 70~80개 즉 35~40시간 만큼 찍지만, 편집을 통해 2시간30분 분량만 남는다.

이처럼 공들여 만들어지는 다큐인지라 시청률도 잘 나온다. 다른 방송에선 메인 뉴스가 방송되는 프라임 시간대인 저녁 8시50분부터 30여분동안 방송됨에도 시청률 10%를 넘어선다. 내레이션을 맡은 아나운서 이금희의 정겨운 목소리도 시청자들을 <인간극장>으로 이끄는 데 큰 구실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