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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눈요깃감 블록버스터, <아이,로봇>

프로야스의 <아이, 로봇>이 아시모프의 이름값을 못하는 까닭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아이작 아시모프의 명성에 대해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아시모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SF 작가이다. 하지만 그게 SF 작가로서 그의 가치를 정당화시켜주는가?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SF 황금기의 다른 ‘거장들’과 비교해도 아시모프는 상당히 떨어진다. 그는 아서 C. 클라크처럼 압도적인 비전으로 독자들을 흥분시킬 능력도 없고, 로버트 A. 하인라인처럼 근사한 이야기꾼도 아니다. 평생 동안 쓴 몇백권이나 되는 책들 중 SF 소설은 몇 작품 되지 않고, 그중 괜찮은 작품들도 똑똑한 십대 소년이 골방에서 쓴 작문 숙제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의 책들은 명쾌하고 재미있으며 아이디어가 풍부하지만 문학적 깊이나 입체적인 매력은 없다.

영화로 만들기에는 까다로운 아시모프의 소설

그러나 SF 팬덤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여전히 아시모프에 대해 좋은 기억을 품고 있다. 나에게 그는 40년대 할리우드영화에 나올 법한 작은 동네의 괴짜 약사 같은 사람이다. 독특하지만 사람 좋고 은근히 아는 것도 많은 동네 토박이 할아버지를 상상해보라. SF 독자들에게 아시모프는 그런 약사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일상의 일부이다. 심지어 그의 작품들이 정말 좋을 필요는 없다. 그의 작품들이 좋건 싫건 아시모프는 여전히 우리의 중요한 일부이고 SF 장르에서 아시모프의 존재를 무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가 괜찮은 작가로서, 좋은 편집자로서, 일급의 SF 팬으로서 활동한 결과물들은 장르의 일부로 남았다.

그의 작품들이 은근히 다른 장르와 전환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런 독점적인 느낌이 더욱 강한 것일 수도 있다. 클라크나 하인라인의 소설들은 훌륭한 SF영화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같은 걸작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아시모프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아직도 <파운데이션> 시리즈가 영화화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원작 그대로 살리면 영화가 엄청 재미없어지기 때문이다. 은하 제국이 멸망하는 거창한 역사적 격동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들이 골방 안에서 끝도 없이 떠들어대는 내용이니 이를 어찌하란 말인지?

그러나 할리우드는 명성을 그대로 낭비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더구나 지금처럼 디지털 특수 효과가 발달하고 SF가 인기있는 장르가 된 시대에 SF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의 이름을 팔아먹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비정상적인 일이다. 최근 들어 아시모프의 이름들이 심심치 않게 할리우드영화의 크레딧이나 제작발표회에 나타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 언급된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알렉스 프로야스의 <아이, 로봇>은 원작을 무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무례한 짓 같지만 따지고보면 이치에 맞는다. 어차피 아시모프의 소설을 순진무구하게 각색해서 인기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만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의 <아이, 로봇> 단편집에서 가장 핵심인 건 개별 이야기들이 아니라 로봇 공학 3원칙이라는 개념이고, 그렇다면 아시모프가 만든 세계의 일반 규칙들만 빌려와 새로 이야기를 쓰는 건 꽤 그럴싸한 생각이다. 이런 시도는 프로야스가 처음도 아니다. 이미 60년대 텔레비전 시리즈의 고전 <아우터 리미츠>에서는 <아이, 로봇>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오리지널 에피소드를 방영한 적 있었다. 주인공 로봇 이름이 아담 링크이고 살인죄로 몰린 로봇의 이야기였으니 이언도 바인더의 소설 영향이 더 컸겠지만 그래도 로봇 소설들의 연속성을 고려해보면 이치에 맞는 제목이었다.

게다가 프로야스와 야키바 골드먼은 아시모프의 원작들을 꽤 읽은 게 분명하다. 영화 곳곳에 아시모프의 원작에서 빌려온 사건들과 개념들이 발견된다. 일단 알프레드 래닝과 수잔 캘빈은 원작 <아이, 로봇>에도 등장하는 인물들이며 성격도 비슷하다. 로봇에 선입견을 가진 형사가 로봇과 관련된 살인사건에 연결되면서 로봇에 대한 선입견을 접는다는 설정은 아시모프의 장편 <강철 도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에서 사건의 기본 동기를 제공해주는 특정 개념은 아시모프의 후기 로봇 시리즈에 나오는 ‘로봇 공학 제0법칙’(“로봇은 인류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해 있는 인류를 방관해서도 안 된다.”)을 먼저 가져와 자기식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정도면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사전 준비는 한 셈이다.

원작의 재료는 가져왔으나 매력은 살리지 못하다

하지만 예의있게 굴었다고 해서 그들이 꼭 좋은 각색자/각본가라는 법은 없다. 각색에서 중요한 것은 표면적인 예의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설정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아이, 로봇>는 여기서 한참 모자란다.

일단 영화가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는 점은 용서하고 넘어가자. 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특수효과에 들인 돈을 멀티플렉스 관객의 주머니에서 뽑아내야 할 테니까. 윌 스미스가 연기한 터프한 로봇 혐오자 형사 스프너는 재수없고 매력도 없으며 스타의 기존 이미지를 잘 활용한 것도 아니지만 그 역시 내가 신경써야 할 부분은 아니다. 아우디 간접 선전임이 너무나도 노골적인 추적신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간섭할 까닭이 없다.

<아이, 로봇>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가 원작의 기본 재료는 상당히 많이 가져왔지만 그 기본 재료들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놓쳤다는 것이다. 아시모프의 소설들은 대부분 논리 게임이다. 그의 세계에서 로봇 공학 3원칙이 그처럼 신성시되었던 것도 그렇지 않으면 게임의 재미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로봇 공학 3원칙은 단순하지만 흥미로운 딜레마들을 만들어냈다. 로봇들에게 로봇 공학 3원칙은 행동의 동기를 제공했다. 대닐 올리버나 지스카드와 같은 로봇들이 적극적으로 인류의 안녕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제1원칙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봇 공학 3원칙은 그런 자유의지에 입각한 그들의 행동을 제한하기도 했다. 언뜻 보면 정연한 규율로 통제하는 것 같은 이 법칙이 복잡한 실제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어떤 딜레마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이 어떻게 해소되는가는 아시모프의 소설들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여기서 논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시모프의 소설들에서 갈등은 지극히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프로야스의 <아이, 로봇>에는 그런 논리가 결여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 프로야스는 아시모프의 발명품들을 그대로 가져와 쓰고 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겠다는 인공 지능 비키의 논리는 후반 <로봇> 시리즈에서 개별 인간들보다 인류를 우선하는 제0원칙을 제시한 지스카드의 논리와 거의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항적인 로봇 서니 역시 앤드루 마틴과 닮은 구석이 있고.

문제는 그 해결 방법이다. 프로야스의 영화에서 비키는 제0원칙을 만들어내자마자 잽싸게 그걸 상위 원칙으로 만들어버리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을 위한 안전 규칙인 제3원칙이 그처럼 쉽게 망가지는 게 말이 되는가? 제0원칙을 만든 지스카드는 인류를 구하기 위한 거창한 선택을 했으나 인간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하위 원칙인 1원칙 때문에 죽었다. 제0원칙은 로봇 공학 3원칙의 정연한 수학적 아름다움을 망쳐버렸다는 게 내 생각이지만, 자신의 행동을 규정하는 법칙에서 논리적으로 더 상위인 원칙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다 결국은 낡은 원칙의 희생자가 되는 지스카드의 이야기는 드라마, 그것도 썩 그럴싸한 드라마였다. 왜 이 엄청난 갈등의 기회를 잡았으면서도 그 기회를 그냥 포기해버리는가? 비키가 ‘악당’이어서?

3원칙을 어길 수 있는 서니의 존재에 대한 해결책은 어떤가? 그건 서니가 로봇 공학 제3원칙을 위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벌써부터 하품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건 바둑을 두는 척하다가 갑자기 상대편의 바둑알들을 알까기로 날려버리는 것과 같다. 거창한 미스터리를 품은 극적인 드라마처럼 보여서 결말까지 기다렸더니 처음부터 수수께끼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갈등도 시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3원칙은 왜 가져왔는가?

로봇에 대한 영화의 불가지론적인 접근법에 대해서는 정말 할말이 없다. 물론 여러분은 자연인으로서 영혼이나 신과 같은 초월적인 개념을 믿을 수 있고 나는 그걸 비난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 먼저 생각한 사람이 프로야스인지 골드먼인지는 몰라도 ‘기계 속의 유령’ 개념을 로봇의 자연 진화를 설명하는 데 가져온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서니의 독특함을 설명하기 위해 ‘설명불가’를 끌어들이고 무의미한 인간성의 모방을 영혼과 독특함의 근거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 해야겠다. 왜 정면대결할 수 있는 기회를 피하고 비겁하게 불가지론 뒤에 숨는 것인지?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더 가치있거나 초월적이라는 법은 없다. 적어도 아시모프는 그의 독특한 로봇들을 설명하기 위해 신비주의나 불가지론을 들고나온 적이 없었다. 그는 정정당당하게 그들의 양전자 두뇌와 로봇 공학 3원칙을 가지고 그 과정을 똑똑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건 그의 로봇 소설들이 가진 큰 장점 중 하나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이작 아시모프를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그의 로봇 공학 3원칙의 의미를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와 3원칙을 어떻게 평가하건, 그들은 이미 중요한 장르의 일부이며 그들은 자연인 아시모프가 죽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살아남았고 발전했다. 그 발전의 과정은 인공지능과 로봇을 다룬 수많은 SF에 반영되어 있다.

프로야스 역시 그 발전을 반영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식 속으로 숨어버렸다. 물론 전형적인 눈요깃감 블록버스터도 있기는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 꼭 아시모프의 이름을 끌어올 까닭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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