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의 오피스텔에서는 범죄영화 비디오 테이프가 발견되고, 영화 <실미도>가 흥행 기록을 세운 뒤에는 실미도로 가는 버스노선이 새로 생긴다. 현실은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모델이지만, 드라마는 다시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모델이 된다. 드라마와 현실, 가상과 실재는 서로 뒤섞이고 결국에는 무엇이 가상이고 무엇이 실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흔히 들어왔던 이런 상황을 이번 여름휴가에 제주도에서도 경험했다. 드라마 <올인>의 무대가 되었던 곳, 제주도 동쪽 끝 바닷가 절벽 위에서 사람들은 드라마를 모델로 하는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성산 일출봉이 바라보이는 드넓은 초원과 파도가 부서지는 절벽 위로 그림 같은 하얀 등대가 서 있는 이곳은 훌륭한 경치 때문에 예전부터 알려진 관광코스였지만, 바로 이 드라마 때문에 최근에 더 유명해졌을 뿐 아니라 관광의 내용 자체가 바뀌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 과장한다면 드라마가 이곳의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까지 남김없이 접수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주차장 앞에서 음료를 파는 상점은 ‘올인휴게소’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고, 절벽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 중간중간에는 드라마 속의 송혜교와 이병헌의 컬러사진을 실제 크기로 확대한 입간판들이 세워져서 이곳이 바로 ‘그 현장’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치 사진 속 배우들을 실제로 만난 것처럼 그 옆에 서서 기념촬영을 하고, 마치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된 것처럼 그들의 포즈와 표정을 흉내냈다. 수녀복 차림으로 기도하는 송혜교의 사진 앞에서는 눈감고 두손을 모은 모습으로, 난간에 걸터앉은 이병헌의 사진 앞에서는 같은 난간에 앉아 외로운 터프가이의 표정으로 사진들을 찍었다.
이곳의 관리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관광객들이 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관광지의 현장에서 찍은 자신들의 사진이라는 것, 사진은 관광의 부수적인 잔여물이 아니라 중요한 목적, 나아가서 관광 그 자체라는 것, 그러므로 이상적인 관광지란 일종의 사진촬영 스튜디오가 돼야 한다는 것…. 이곳에서 나는 영화 <트루먼 쇼>에 나오는 것과 같은 거대한 촬영용 세트 속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 드라마에 사용되었던 세트와 똑같은 모양으로 진짜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실제 드라마 촬영에 사용됐던 세트가 태풍에 날아가버렸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그곳에 합판이 아닌 콘크리트로 된 진짜 집을 짓고 있다. 이름하여 올인기념관. 이 건물이 완성되면 관광지도 속에서 이곳의 지명이 바뀔 것이다.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무언가를 기념할 ‘장소’다. 무엇을 기념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제주 4·3사건과 같이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이든 드라마 속에서 지어낸 사건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장소에 누구나 알고 있는 어떤 사건, 어떤 일화가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사람들에게는 그 장소에 자신이 직접 가본 적이 있다는 사실과 이를 증명할 기념사진이 필요하다.
여행지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명소(名所), 말 그대로 이름이 붙어 있는 어떤 장소다. 이름이 없는 것들, 노을이나 뭉게구름, 반짝이는 풀잎들 같은 것들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들에는 이름이 없기 때문에, 아니 그것들의 이름이 고유명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유명사가 붙은 어떤 장소에 있는 우리 자신의 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을 가고 있다. 우리의 여행이 사진에 너무 많은 것을 ‘올인’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