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찰나적 관계만을 유지한다. 사랑해도 함께 할 수 없고 함께하는 사람들도 한 꺼풀 들쳐보면 남과 진배없다. 이런 관계 속에 지속성이나 미래가 존재할 수는 없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효섭은 그 와중에 벌금을 대신 내주는 여유가 있었고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은 택시를 끝까지 기다려주는 매너가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생활의 발견>에선 뱀으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선 세균으로 변해간다(헌준이 말한 보석의 영어발음은 Gem이 아닌 Germ에 가깝다). 그러니 섹스에서도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고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 다섯 번째 변태를 겪은 이 세계의 군상들은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닌, 제법 깊은 역사와 두터운 감염층을 지니고 있다. 근데 그게 바로 평범한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 스승으로부터, 그런 부모로부터 혹은 그런 영화들로부터 무한 증식한(그리고 계속 증식할) 세균들 말이다. 그걸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이 홍상수 영화의 잔인함이고 미덕이다. 부록을 통해 헤어 드레서 역할까지 수행하는 감독의 모습과 편집된 문호 아내의 스틸사진을 볼 수 있다. 한글자막 선택은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중국집에서의 대화도 보여준다. 하지만 배우 코멘터리마저 없어 DVD적 측면에선 <생활의 발견>보다 후퇴한 느낌을 준다. 데뷔작부터 감독이 애용해온 1.85:1 화면비의 영상은 더도 덜도 아닌, 평범했던 필름만큼의 화질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