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울지마, 죽지마, 소통할거야, <인어공주>

<인어공주>, 모녀관계를 치유하는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지겨운 엄마의 삶보다도 진저리나는, 세상 모든 딸들의 입에서 주술처럼 흘러나오는 이야기. 엄마를 닮지 않겠다는 그 진부한 맹세는 이미 엄마처럼 살고 있음을 통감하는 딸들의 체념섞인 외침과 다르지 않다. 딸들은 부정과 체념을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세상은 팔짱끼고 앉아서 그녀들의 눈물겨운 외침을 감상한다. 나는 이 절절한 울부짖음에 눈물을 보태는 대신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말에 과잉 반응하는 세상을 의심한다. 엄마와 딸 사이의 이 과잉된 감정이 반복되는 동안 세상은 그녀들의 공통된 운명 덕택에 안락을 누리고 그녀들은 오로지 짜증 혹은 체념 뒤의 연민으로만 서로 소통하는 법을 익힌다.

그런데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며 질질 짜는 또 하나의 신파에 동참하지 않고 엄마와 딸의 말싸움에 2시간을 몽땅 할애하지 않으면서도 그녀들 사이에 언어를 되찾아준 영화가 나왔다. <인어공주>는 “엄마처럼 살까, 말까”의 단순하고 지리멸렬한 이분법이 엄마와 딸간의 유일한 화두가 아님을, 나아가 엄마와 딸의 관계는 극복의 문제가 아니라 “발견”의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딸들은 자기 파괴적인 주술을 되풀이하지 않고도 엄마와 자신의 관계를, 그리고 스스로의 삶을 서사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글은 영화 속 나영(전도연)의 환상에서 딸이 써내려간 딸과 엄마의 서사를 읽으며 그것이 모녀관계에 부여한 신선한 소통의 힘에 주목한다.

환상, 딸의 서사이자 엄마의 서사

<인어공주>에서는 자신의 과거를 처연하게 읊어대는 어머니가 없다. 엄마의 과거로 돌아가는 자, 그러니까 환상을 꿈꾸는 주체는 딸이다. 그 환상 속에서 현실의 억센 엄마와 무기력한 아버지는 순수한 소녀와 낭만적인 청년이 되어 있다. 게다가 환상 속에서 딸과 엄마는 지긋지긋한 가족이 아닌 친구 같은 관계가 되어 만난다.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딸, 딸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엄마. 이 아름다운 동화는 딸의 환상이다. 그것이 실제 과거였는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 과거는 딸의 환상 속에서 재구성된 이야기에 가깝다. 딸의 동화 속에서 살아나는 엄마의 과거. 그것은 나영의 환상이 딸의 서사이자 엄마의 서사임을, 다시 말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시선에 의해 구성된 서사가 아니라 딸과 엄마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환상은 엄마의 로맨스를 중심으로 흐르지만 그 환상을 꿈꾸는 자는 딸이다. 딸은 엄마의 이야기 외부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엄마와 직접 대면하여 그 시공간을 함께 경험한다. 딸은 엄마의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결국 그것은 딸과 엄마의 관계가 바탕이 된 딸 자신의 서사인 것이다.

영화의 초반에 나영은 답답한 현실 속에서 말한다. “단 한순간도 아름다운 기억이 없어. 모든 게 현실이야.” 부모가 자신에게 준 기억들 모두가 악몽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하는 나영은 가족도 결혼도 원하지 않는다고 외친다. 그러나 그녀의 남자친구는 나영의 말이 거짓말임을, 그녀는 다만 현실의 무거움 때문에 스스로의 욕망을 애초 거세하려고 애쓰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현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환상으로 도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인어공주>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용감해진다. 대부분의 판타지와 달리 나영은 환상으로 단순히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긍정하기 위해 스스로 환상이라는 이야기를 “만든다”는 사실. 그녀는 더이상 부모가 아름다운 기억을 물려주길 기다리거나 어차피 모든 것은 현실일 뿐이라고 체념하는 대신 스스로 행복한 기억을 창조한다. 부모의 자격을 탓하며 자신의 불행을 되새기기를 그만두고, 그녀는 “아름다운 기억”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현실의 엄마는 자신을 단 한순간도 따뜻하게 보듬어주지 않았지만 환상 속에서 나영은 자신이 언니가 되어 엄마를 안아준다. 그녀의 환상은 현실의 엄마를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구성된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현실을, 삶을 긍정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가슴 아픈 기억만을 남긴 가족을 영원히 저주하는 대신 나를 긍정하기 위해 어렵게 써내려가기 시작한 과거와 현재에 대한 소설이다.

팀 버튼의 영화 <빅 피쉬>에서는 환상을 말하는 주체로서 아버지가 등장한 바 있다. 아버지의 과거는 기이한 환상들로 가득 차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환상이 모두 거짓이라고 의심하며 끊임없이 환상의 진실을 캐묻는다. 그런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때는 아버지가 자신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이다. 아버지로부터 환상을 “말하는” 자리를 물려받게 되자 아들은 더이상 환상을, 아버지의 과거를 의심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 뒤 그의 가부장적 위상을 그대로 차지하게 된 아들이 더이상 불안해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환상이란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현실의 질서를 공고하게 다져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인어공주>의 환상은 현실과 뚜렷한 연결고리 없이 “관계”에 대한 딸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엄마의 과거는 엄마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엄마가 과거를 말하고 딸이 그 과거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빅 피쉬>의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고 아버지를 긍정하게 된 반면 <인어공주>의 딸은 애초 엄마에게 물려받을 그 무엇도 없다. 오히려 딸은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는 것만이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잘 안다. 딸에게는 그야말로 홀로 자신의 자리를 개척하거나 자신이 증오하는 누군가의 역할을 답습하는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그 기로에서 딸이 선택한 것은 복수도, 증오도, 체념도 아닌 가족과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해줄 이야기,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도 엄마를 바라볼 수 있는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이다. 엄마처럼 살기 싫었으나 엄마가 되어 어쩔 수 없이, 마치 본능과도 같이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혹은 엄마가 죽고 난 뒤 후회하며 꺼내는 엄마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지금 여기 살아 움직이는 엄마를 인정하기 위한 이야기. 나영은 끊임없이 “대학은 나중에, 여행은 나중에…”라고 말하지만 막다른 길 위에서 더이상 “나중에”만 외치고 있을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녀는 엄마의 존재를 부정하고서, 자기 삶과의 화해를 미루고서는 자신의 삶이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영이 불행의 원천이었던 부모를 긍정하는 환상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하는 방식을 발견한 것은 감동적이다. 그녀는 여느 아들처럼 아버지의 자리를 기다리며 불안해하거나 가족 자체를 부정하고 버림으로써 상처를 억누르지 않기 때문이다.

환상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영은 떠난 아빠를 그리워하며 엄마가 쓴 편지를 붙여준다. 우체국 앞에서 나지막이 미소를 짓는 나영의 모습에서 우리는 꾹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조용히 매듭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환상의 시작, 홀로 하리의 과거 속에 내던져졌던 나영은 그렇게 홀로 그 과거를 닫는다. 동화 속 나라 뉴질랜드로 피신하는 대신 스스로 한편의 동화를 완성한 그녀에게는 이제 기억할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생겼다. 엄마가 순수했던 과거를 돌이키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적 없듯이 딸 또한 엄마의 거친 현재가 아버지의 무능력에 의한, 세상 풍파에 의한 것이라고 굳이 위로하려들지 않는다. 현실 속 엄마에게 실제 과거는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아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 엄마는 단 한번도 그 과거에 대한 미련을 이야기한 적 없을지라도 딸은 자신의 동화를 통해 엄마와 자신 사이에 새로운 역사가 생겼음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딸은 자신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또 다른 엄마를 발견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영화의 후반부, 현실로 돌아온 딸 나영이 또 한명의 엄마가 되어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장면. 나영의 딸이 찾아낸 할아버지 사진에서 나영의 모습은 더이상 실재하지 않지만 나영은 자신이 투명인간처럼 그 시공간에 엄마와 함께 존재했음을 믿는다. “사진 속 아버지가 웃고 있어?”라는 나영의 질문은 엄마 말처럼 분명 밋밋하고 싱겁기 짝이 없지만 딸은 비로소 엄마와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찾아낸 것이다. 적어도 이제 엄마는 나영의 말에 악을 쓰는 대신 피식 웃고 나영은 엄마에게 궁금한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를, 나를, 버리지 않고 상처 치유하기

다시 현실로 돌아온 엄마에게는 더이상 로맨스도, 과거도, 바다도, 순진함도 아무것도 없지만, 그 엄마는 적어도 살아남았다. 평생을 상처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이제 나도 쉬고 싶어”라며 눈물을 떨구는 나약한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여전히 씩씩하게 침을 뱉는다. 아버지의 제삿날에도 여전히 막힌 변기를 뚫으며 옷을 훌렁 벗는 엄마는 누군가를 탓하며 자신의 불행을 곱씹을 힘으로 차라리 질기게 웃는다. 바다 대신 목욕탕이라는 자기 세계를 지키면서. 그리고 현실로 돌아온 딸은 “이제 나는 엄마를 이해해”라며 눈물을 흘리는 대신 지금 현재의 엄마를 받아들이는 건강한 방식을 홀로 터득해냈다. “엄마처럼 살기 싫었어”라고 외치며 결국 엄마에게 연민하는 것이 엄마에 대한 사랑이라고 체념하는 딸들에게 나영과 연순은 들려준다. 엄마를 버리지 않고, 나를 버리지 않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길에 대해.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