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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비밀아닌 ‘출생의 비밀’
2004-07-19

<파리의 연인>등 너도나도 알고보면 ‘배다른 형제’

한국의 안방극장에서 넘쳐나는 것은 신데렐라와 백마탄 왕자만이 아니다. 드라마를 즐기는 시청자라면 금새 눈치챘겠지만 한국 드라마가 ‘출생의 비밀’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이제 더이상 ‘비밀’이 아니다.

꿈의 시청률 50%를 향해 돌진하는 에스비에스 <파리의 연인> 제작진은 ‘출생의 비밀’을 50% 돌파의 뇌관으로 활용할 계획임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삼촌과 조카 사이로 나오는 기주(박신양)와 수혁(이동건)이 사실은 아버지가 다른 형제라는 것을 조만간 드러낼 예정이다.

문화방송 수목드라마 <황태자의 첫사랑>도 시청률공식에 충실한 구색은 다 갖추고 있다. 협찬사의 홍보비디오를 방불케하는 극중 배경에다 연기력을 갖추지 못한 주인공, 요즘 유행하는 색다를 것없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물론 비밀 아닌 비밀도 있다. 발리의 아름다운 리조트 사원 유빈(성유리)을 놓고 회장 아들인 건희(차태현)와 갈등관계를 보이는 엘리트 사원 승현(김남진)이 호텔 재벌 차회장(이덕화)의 숨겨진 장남이라는 사실이다.

20부작 넘는 드라마 길이와 관련‥퇴행성의 증거

지난해 문화방송 일일극 <인어아가씨>에서 주인공 은아리영(장서희)의 출생 비밀을 이야기 줄거리로 써먹은 임성한 작가는 현재 집필중인 <왕꽃선녀님>에서도 주특기를 발휘할 예정이다. 평범한 대학원생 주인공인 초원(이다해)이 신기를 느끼기 시작하는데 알고보니 무당의 딸이었다는 설정이다. 이미 비밀이 공개됐지만 한국방송 2텔레비전 <애정의 조건>에서 금파(채시라)와 은파(한가인)도 사실은 친자매가 아니라 엄마가 다른 이복자매였다. <섬마을 선생님> 후속으로 오는 28일부터 방송되는 에스비에스 <형수님은 19세>의 주인공 정다빈도 알고보니 재벌가의 숨겨놓은 딸이라는 이야기다.

드라마 제작진들이 유독 출생의 비밀을 좋아하는 까닭은 드라마의 길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짧아도 20부작을 훌쩍 넘기는 ‘대작’(?)이 대부분인 한국의 드라마 제작현실에서 극적 긴장감을 유지한 채 이야기를 끌고가기에는 출생의 비밀만큼 손쉽고 영양가 있는 장치가 없다고 제작 관계자들은 말한다. 게다가 조금만 인기가 높으면 예정된 편수보다 4~6회 늘리는 게 예사다. 여기에다 드라마의 대부분은 가족이나 주변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애정관계에 초점이 맞춰진 점도 출생과 비밀이 남발되는 요인이다.

방송사의 한 프로듀서는 “20부작이 넘는 드라마의 경우 방영기간 내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 잡기가 매우 힘든 상황에서 극적 긴장을 높여 관심을 계속 이어가는 장치로 출생의 비밀만한 게 없다”면서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핏줄에 집착하는 것도 한 요인일 것”이라고 말했다. 출생의 비밀 남발은 한국 드라마의 퇴행성을 입증하는 또다른 증거일지도 모른다.

한겨레 김도형 기자aip20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