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 <몬스터>에서 매춘의 희생자를 목격하다
매춘은 흔히 필요악이라고 한다. 매춘의 필요성은 일반적으로 ‘난폭한 성 에너지의 관리’ 차원에서 거론된다. 성의 독점적 교환을 전제로 한 일부일처제에 내재한 성적 억압을 ‘사회적으로 무해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배출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매춘을 도덕적으로 승인하고 합법화하면 성의 독점적 교환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 일부일처제의 이념을 정면으로 위반하게 된다. 매춘은 도덕적으로는 악으로 남아야 한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매춘을 필요악의 자리에 갖다놓고 관리하는 것이다. 매춘 정책의 원칙은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키되 일부일처제의 이념을 흔들지 않기 위해 필요할 때 언제든 개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매매춘의 당사자가 사회적 발언권이 없어야 하고 단속의 효율을 위해 평소에 일정한 지역 안에서 관리되어야 한다. 그래서, 매춘은 불법으로 규정되고 행정적으로 용인되거나 엄격한 조건하에서만 합법화되며 특정 지역에 집중된 채 관리된다. 매춘을 ‘집중과 유폐’를 통해 사창가란 특정 지역에 한정하는 것은 과거 천민집단을 특정지역에 격리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사회적 효과를 얻는다.
흔히 매춘 발생의 사회적 조건으로 빈부격차, 성계급 격차, 성 억압의 문화 등을 꼽는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남녀 차별이 심하고 순결이데올로기가 강할수록 매춘도 심해진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에서 배출구 역할로 캐스팅되는 사람은 망조든 가난한 집안의 얼굴 반반한 젊은 여성이게 마련이다. 여기서, 사창가의 존재는 매춘을 사회적 조건의 결과가 아니라 개인적 행위의 결과로 부각시키는 스펙터클로 작동한다. 사창가는 일부일처제의 규율을 어긴 창녀라는 위험한 육체가 전시되는 장소이다. 창녀는 더러운 욕망의 환유이며 도덕적 악의 은유로 사회로부터 오직 한 가지 명령만을 받는다. 입을 닫고 몸만 열어라! 사회는 사창가를 지정하고 창녀의 육체를 스펙터클로 전시함으로써 매춘을 발생시킨 조건과 몸을 사고판 창녀와 고객 사이의 거래의 존재를 삭제한다. 매춘과 관련된 모든 사회적 서사는 사창가라는 스펙터클 속에 가리고 책임은 창녀에게 돌아간다. 그리하여 사창가는 발언권을 몰수당한 창녀들의 장소로 언제든 위생학적 조치가 가능한 사회적 환부로 남아 있다. 이 장소에서 정녕 심각한 문제는 여성이 몸을 판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폭력이 집중되는 곳에 아무런 자기보호의 장치도 없는 젊은 육체가 방치돼 있다는 사실이다. 복개해버리고 싶은 우리 안의 더러운 욕망과 비열한 행동에 대한 유일한 증인인 창녀는 증인 살해라는 가열찬 집단적 욕망의 희생양으로 방치돼 있다.
<몬스터>는 연쇄살인범으로 사형당한 미국의 성매매 여성 얘기다. 여덟살 때 강간당한 이후 지속적인 폭력 속에서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그는 딱 두번 발언했다. 어린 동성애 애인에게 “사랑한다”고 처음으로 말을 했고, 나머지는 자기에게 폭력을 가해오는 남자들에게 총성으로 답했다. 상황에 맞는 표현법을 배우지 못한 그는 남이 보면 작은 폭력에 총으로 화답한 바보다. 그러나, 그의 총성은 어릴 때부터 받아온 야비한 폭력을 적금 들 듯 꼬박꼬박 육체 속에 간직했다가 한꺼번에 원래 임자에게 돌려주는 답신이다. 창녀로서 자신의 육체를 이용하면서 자신의 존재는 지우고자 한 야비한 사회에 대한 답신. 그러니, 이 여성의 연쇄살인의 진정한 계기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몬스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 폭력인지도 모르고 행동하는 괴물. 법과 규범의 가면 뒤에서 진실게임을 벌이는 무수한 인간들의 야비한 욕망이 만들어낸 사회구조라는 거대한 괴물. 그는 이 괴물에게 인생 전체를 강간당했다.
감독은 이 사회적 괴물의 존재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태도가 어정쩡하다. 살인을 동성애 애인 탓으로 슬쩍 돌려놓고 사회적 괴물과의 대면은 피해버린다. 그럴듯한 영화 소재만을 취하고 머리 아픈 얘기는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샤를리즈 테론이라는 미인이 괴물로 분장한 게 주인공의 삶보다 더 부각되니 말이다. 역시 사회적 괴물과 대면하는 데는 김기덕을 당할 감독이 없는 것 같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 commat@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