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13>은 구식 헤어스타일과 석간신문, 그리고 무개 리무진이 주름잡던,
무엇보다도 미합중국 대통령이 한 역할 했던 스릴 넘치는 옛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노련한 감독 로저 도널슨과 신예 시나리오 작가 데이비드 셀프는,
케네디 대통령과 그 참모들이 백악관에서 자칫 세상을 아마겟돈으로 만들 뻔 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논의하는 내용이 담긴 비밀도청 테이프들의
녹취록을 토대로, 둘이 함께 했던 전작의 수준을 뛰어넘는, 눈 돌릴 새 없이 긴박감 넘치는 정치 스릴러를 만들어냈다.
<D-13>의 상영시간은 거의 두시간 반이나 되지만, 군더더기 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1962년 10월 16일, 대통령(브루스
그린우드)이 쿠바에 배치된 소련 공격무기의 항공정찰 사진들을 건네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의 최측근 참모인 케네스 오도넬(케빈 코스트너)은
그의 아일랜드계 가족들이 사는 보스턴의 아늑한 호화저택에서 찬바람 도는 뉴프런티어 성채, 백악관으로 황급히 달려온다. “진주만으로 진격해오는
일본 항공모함을 발견한 느낌”이라는 그의 말은 사태의 핵심을 정확히 보여준다. 합동참모회의의 멤버들은 즉각 공습을 감행한 뒤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문역으로 끌려나온 노회한 냉전시대의 전사 딘 애치슨(렌 캐리우)도 맞장구를 친다.
그러니까 케네디는 속을 알 수 없는 러시아에 대처할 방법을 강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휘하의 군지휘관들까지 말려야 하는 처지였다. 미국대 공산주의의 대결일 뿐 아니라, 문관 대 군관의 대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쌈박한 도덕적 등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D-13>은
몇가지 정황을 선별적으로 모른척 한다. 케네디가, 중간선거에 맞춰 피델 카스트로를 아작내려는 자기 정부의 음모, 속칭 ‘몽구스 작전’을 은폐하려고
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게 그 하나요, 존 맥콘 CIA 국장이 쿠바에 소련미사일이 배치됐다는 사실을 보고한 것이 거의 두달 전 일이라는
사실이 빠진 게 또 하나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관한, 사후출판된 로버트 케네디의 저서에서 제목(Thirteed Days)을 따온 이 영화는, 실존 드라마
그 자체다. 으리번쩍한 목제 테이블을 주무대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회의실에서 벌어지는 고도의 암투극같기도 하다. 하지만 스릴로 치자면 기업합병을
이에 비할 것인가. (작가 노먼 메일러는 훗날, 케네디가 쿠바를 봉쇄했던 그 주일을 가리켜, “온 세상이 벼랑 끝에 선 기분을 느꼈고…건물을
지날 때면 저 건물을 또다시 볼 수 있을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고 썼다.) TV에 나가 미국민들에게 2차대전을 상기시키며 3차대전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촉구하는 케네디는 영웅적으로 침착하고, 완전히 사태를 장악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 영화는 케네디가 심지어 로널드 레이건까지 앞질러,
미국 사상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이라는 여론조사 결과에 한몫 더 보태줌직 하다.
그린우드가 연기하는 존 케네디와 스티븐 컬프가 연기하는 로버트 케네디는 몸짓이나 발성, 그리고 머리모양까지 썩 그럴듯하다. 딜런 베이커가 연기하는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도 마찬가지고. 악역은 드라큘라 배우 벨라 루고시를 연상시키는 소련 특사 안드레이 그로미코(올렉 쿠프라)와 공군 장성
커티스 르메이(케빈 콘웨이)가 맡는다. 르메이는 '빨갱이 새끼들'을 때려잡고 싶어 안달난 나머지 케네디를 공개적으로 조롱하는 바로 그 작자다.
물론 ‘앙꼬’는 케빈 코스트너다. 쿼터백이자 전위수비, 게다가 치어리더 역할까지 하는 그는 케네디의 머리요, 오장육부요 양심이다.
그의 존재로 인해 <JFK>의 전단계 이야기를 다루는 속편영화로서의 성격이 한층 강화된다. 그가 연기하는 케네스는 사태의 본질이
뭔지를 언제나 간파하는 혜안의 소유자다. 합참에서 전쟁을 원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눈치 챈 것도 그요, 막후협상의 여지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대통령이 파견한 특사도 그이며, 아들라이 스티븐슨이 UN에서 소련과 맞장 뜰 수 있는 배짱의 소유자라는 걸 믿은 유일한 사람도 그다.
쿠바 미사일 사태의 가장 끔찍한 측면은, 오로지 세상의 이목만을 의식한 채 진행됐다는 점이다. 소련 잠수함 함대의 존재를 감안하면, 쿠바에
미사일 몇기가 있다고 해서 힘의 균형이 바뀌는 건 아니다. 러시아는 이미 워싱턴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만한 핵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도움을 준, ‘미사일 병력에서 미국이 뒤진다’는 거짓주장과는 달리, 당시 미국의 핵병력은 소련의 10배를 넘었다.
러시아가 군사경보 부문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는 것도 아마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영화가 이런 사실을 축소한 것은 드라마적인 이유에서 이해할
만하다.)
반면 합참 멤버들은 케네디 명령보다 한수 더 떠 핵전쟁 바로 전단계인 데프콘 투를 발령하고, 이것이 쿠데타 시도로 비칠까 우려한 케네디는 격노한다.
마초 공군조종사들이 쿠바에서 저공비행을 일삼고 그 지휘관들이 군사개입의 법칙에 대해서 침을 튀겼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사태는 쉽게 통제불능으로
흐를 수도 있었다. 실제로 <D-13>을 보고 있노라면,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시나리오가 어쩔 수 없이 떠오른다.
맥나마라가 회의실에서 날뛰는 장성들과 맞서고 있는 장면에서는, 이 사태 와중에 쏟아진 어록중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 “우린 눈싸움을 했는데,
상대가 방금 눈을 깜박거렸다”는 말이 새롭게 되새겨진다.
<D-13>는 당시 세계가 어떻게 핵전쟁 직전까지 갔는지 배경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럴뻔 했다는 사실 자체와 다행히 재앙은
막았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 그러나 시의적절한 측면도 있다. TV 다큐드라마 <10월의 미사일>(Missiles of October)은
리처드 닉슨이 사임한지 넉달 뒤에 방영돼, 미합중국 대통령의 위신을 되살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D-13>의 타이밍도 그 못지
않다. 물론 그 결과가 그리 마음 편치만은 않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조지 부시가 그 같은 상황 아래 놓여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2000.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