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흥행에 크게 성공을 거둔 영화들의 목록을 보면, 남성들은 친구와 같은 개인적 관계 그리고 학교나 폭력조직과 같은 공동체를 불문하고 위계와 유대, 충성과 배신, 우정과 의리와 같은 지극히 남성적인 드라마를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이는 정확하게는 조폭영화 붐의 발단이 된 <친구> 이후 한국영화가 아버지, 형님, 친구 등을 비롯하여 남성 주체 자체나 남성들만으로 구성된 동성사회에 강박적으로 집중해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한국영화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비평의 지형도는 한국영화 자체의 흐름과 거의 같은 구조를 보여준다. 영화비평의 차원에서도 남성 중심적인 서사가 끊임없이 동심원을 그리며 반복, 확장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서구인들(특히 서구 남성들)의 원형적인 무의식을 구성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구조화하는 근본적인 무의식적 기제로 논의되는가 하면(남재일, <씨네21> 441호)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맞물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소년성’이 최근 한국영화의 성공을 이끈 또 다른 주역으로 해석된다(허문영, <씨네21> 446호).
물론 비평 역시 창작된 텍스트만큼이나 하나의 서사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즉 하나의 전망과 틀 속에서 일정한 논리에 따라 또 하나의 ‘허구적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런데 한국영화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설명이 오직 남성 주체의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아버지되기 과정의 문제로만 환원되는 이러한 담론화 과정에서 수많은 타자들과 소수자들의 존재와 심리는 다시 한번 더 주변으로 밀려나거나 보이지 않게 된다. 한국영화에 대한 비평적 작업이 이처럼 완고하고도 퇴행적으로 ‘남성 중심적 패러다임’으로 회귀하는 경향은 ‘신르네상스’를 맞이한 한국영화의 전체적인 지형도나 내적 경향을 잘못된 방식으로 총체화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화비평에 페미니즘이 개입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거나 회의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열정적으로 재개되어야 한다.
‘남성 중심적 패러다임’으로 퇴행하는 한국영화 비평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이 당대의 대중영화 비평에서 두드러진 흐름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의 영화산업과 문화가 양적인 팽창과 질적인 전환을 기록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 이후다. 이 개입을 통해 당대의 한국영화들을 젠더 정치학의 관점으로 배치하여 읽어내는 기념할 만한 성과가 이룩되었다. 젠더 정치학의 관점에서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을 요약하자면, 1997년이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한국영화에서는 위기에 빠진 남성성을 필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진다. 이 와중에 여성은 여전히 타자와 무기력한 희생자에 머물면서 무력한 민족-국가의 알레고리로 작동하거나, 남성들의 관계와 액션에 가려진 채 부차화되거나 인지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전락하거나 사라진다. 한편으로는 성적으로 적극적인 여성 즉 ‘성애화된 여성 주체’의 재현에 몰두했고 이들은 한국 영화사에서 전례없는 전복적인 의미나 해방적인 제스처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들이 야기하는 텍스트 내의 긴장감과 에너지는 이를 봉쇄하려는 또 다른 힘들과 끊임없이 다투었고, 그 결과 더 강력하고 효과적인 반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예컨대 <쉬리>에서 민족적 비극을 은유하는 분열체로 여성을 나눈 한국영화는 <해피엔드>에서 중산층 가정 내의 여성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도 폐기처분한 뒤에, 드디어 여성을 향한 온갖 가학적인 환상들을 거침없이 풀어놓는 김기덕의 영화를 정전화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여정을 밟아온 셈이다.
김기덕 똑바로 바라보기가 필요페미니스트의 관점으로 영화를 비평한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김기덕은 여전히 해명하고 넘어가야 할 도전적인 과제로 남아 있다. 여기에서 평론가들은 이중의 곤경과 마주치게 된다.
그의 영화 세계가 담고 있는 하위 계급성이 많은 남성 평론가들의 좌파적 지향성 내지는 자신의 중산 계급성에 대한 자괴감을 건드리면서 공감이라기보다는 추앙이나 경탄에 가까운 반응들을 자아낸 점, 필자를 포함하여 일부 여성 평론가들이 김기덕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을 했던 점은 모두 계급 정치학과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기존에 김기덕의 영화들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던 담론화의 과정은 비평가들 나름의 내면적 콤플렉스 또는 반대로 은밀한 우월감의 발로라는 점에서 어느 쪽이든지 간에 진정성이나 엄밀함이 조금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된다(따라서 이 부분은 당연히 필자 자신의 자기 비판도 일정 정도 포함하고 있다).
더구나 김기덕의 영화들은 비평가들의 상상력의 범위나 대응 속도를 넘어서서 더 발빠르고도 폭넓게 변화해가고 있다. 즉 그의 작품 세계는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사마리아>까지, 그가 이전의 거친 공격성과 무절제한 표현력을 완화시켜가고 있을 때, 과연 평론가들은 얼마나 달라진 논리와 근거로 그의 영화들을 재평가하면서 이전 논쟁에서의 입장들을 이어갈 수 있을까? 별로 확신도 들지 않고 실제로 그 부분에 대하여 설득력 있는 비평을 접한 적도 없다.
예를 들어 남성평론가인 정승훈은 <사마리아>의 여진이 “분열증의 잠재력을 내장한 채 아버지의 법 바깥을 오간다”(<씨네21> 448호)며 여성주인공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는데, 이 영화에서 김기덕 감독이 그려내는 여남 관계는 여전히 소통 불능이며 그들이 속한 세계 역시 아직까지는 폐쇄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타당하게 들리지 않는다. 여성평론가인 황진미는 “텍스트로 돌아가자”며 같은 영화에 대하여 철저하게 기술적(記述的)으로 접근하는데(<씨네21> 446호) 이 또한 김기덕의 영화들이 갖고 있는 논쟁적인 면모들을 비껴서는 소득없는 작업으로 느껴진다.
도리어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김기덕의 영화들이 젠더 관계에서 어떻게 구조화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김기덕의 영화들이 지닌 감각적 호소력은, 일정한 거리두기를 전제로 하는 ‘시선’보다는 ‘몸과 몸 또는 몸과 사물의 직접적인 부딪힘’에 더 많이 의존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같은 물리적인 직접성과 감각적인 생생함은 주로 남성의 육체를 향한 극도로 피학증적인 묘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는 여성의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극단적으로 폭력적이며 착취적인 재현들과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리면서, 결국 남성의 자기 순결성과 희생자적 위치에 대한 알리바이의 역할을 한다. 남성주인공들이 가학증적인 폭력과 피학증적인 구원 및 보상이라는 양극 사이를 오가면서 자신의 환상과 숨겨진 욕망들을 전개하고 풀어내기 위해서 여성의 존재와 섹슈얼리티를 동원하는 셈이다. 이는 여성과 남성간의 화해하기 힘든 적대적이고 비상호적인 관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남성 주체 내부에 존재하는 두개의 대립적인 충동, 즉 ‘신성, 비전, 가부장적 통제를 향한 가학증적 상승과 자연, 무의식, 모체와의 융합을 향한 피학증적 퇴행’을 반복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여성의 목소리로 ‘차이’에서 화해를 이끌어라
앞에서 나는 한국영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평 역시 남성 중심의 완고한 패러다임으로 퇴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구의 경우에도 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이와 같은 경향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틀을 모색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현재 남성의 목소리로 일방향적으로 울려퍼지는 다수와 주류 담론의 지배에 저항하고 균열을 내면서 그 안에 억압되어 있는 것들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차이’를 ‘차별’이 아닌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화해의 원천으로 작동하게 하는 작업, 그것이 바로 ‘지금의 한국적 맥락에서’ 페미니즘 비평에 요구되는 역할이자 페미니즘 비평 스스로가 수행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