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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간 美영화협회장 지낸 잭 발렌티 사임
2004-07-02

무려 38년 동안 미국영화협회(MPAA)와 영화협회(MPA) 회장직을 지낸 잭 발렌티가 1일 마침내 사임을 발표했다. 발렌티(82)는 "그것은 롱런이었고 대모험이었다"고 회고하고 "나는 영화산업을 사랑한다. 나는 매일 아침 깨어나 열심히 일에 임해 왔다. 그러나 이젠 모든 일들이 끝났다"고 말했다. 미국의 기업전문 미디어인 PR뉴스와이어에 따르면 그는 1966년 5월 린든 존슨 대통령의 백악관 특별보좌관직을 사임하고 1922년 설립된 MPAA의 세번째 회장에 취임했다. 그가 MPAA 회장직을 수행해온 동안 대통령은 8명이나 갈렸다.

38년 동안의 재임 중 그는 영화와 TV 풍토의 대변혁을 주도해왔다. 그가 회장직을 맡았을 때 회원사들은 주로 극영화와 TV프로 위주의 국내활동에 관여하고 있었다. 발렌티의 취임 무렵인 1967년, 할리우드 주요 영화사들의 총수입은 12억6천만달러였으며 이 가운데 국제시장 수입은 4억1천200만달러로 33%에 불과했다. 그후 외형의 성장과 개혁을 통해 세계적 연예산업과 문화 경제산업의 선도자임을 자처해온 MPAA와 MPA는 2003년 총수입이 약 412억달러에 달했다. 이 중 국제시장으로부터의 수입은 40%인 166억을 차지했다. 발렌티는 MPAA의 위임은 "미국영화와 TV프로를 보다 자유롭고 경쟁적으로 전세계로 이동할 수 있게 만들도록 하는 것"이라고 자주 말해왔었다.

그리고 최근 몇년 동안엔 "디지털환경에서 도난을 방지토록 하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1960년대 후반 영화산업이 폭력 및 섹스물을 둘러싸고 이를 규제하려는 관리들과 보다 많은 자유를 원하는 제작자들 간에 팽팽한 긴장이 계속되고 있었을 때 발렌티는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MPAA 전 회장 윌 헤이즈가 만든 헤이즈검열규정을 버리고 대신 혁명적인 자율영화등급제도를 창출했다. 그로서는 전임자의 규정이 수용할 수 없는 검열제도였다고 본 것이다.

발렌티의 새 등급제도의 목표는 영화마다 등급을 정함으로써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하는 영화를 자율적으로 선별하도록 해주려는 것이었다. 제작자나 감독은 영화에 대해 등급을 매기지 못하게 했고 어떤 강요도 못하도록 했다. 이 제도가 탄생한 것은 1968년 11월 1일이었다. 그후 이 제도는 꾸준히 부모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발렌티는 또 미국영화에 대한 대대적 해적행위가 있을 것을 예측하고 전세계로부터의 도둑질을 퇴치하기 위해 1975년 대(對)해적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최근 몇년 동안엔 영화들이 도난을 당하지 않고 디지털시대에 진입하도록 하는 데 동료들과 함께 시간과 정력을 쏟아왔다.

美영화협회, 발렌티 후임 신임회장에 댄 글리크먼 선임

미국영화협회(MPAA) 이사회는 1일 댄 글리크먼 전 농무장관을 MPAA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로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기업전문 미디어인 PR뉴스와이어에 따르면 글리크먼은 38년 동안 회장직에 봉직한 후 이날 정식 사임을 발표한 잭 발렌티의 후임이다.

글리크먼은 오는 9월 1일부터 회장직을 맡게 된다. 발렌티는 그 때까지 CEO직을 계속 수행키로 합의했다. 글리크먼 선임은 중역탐색회사인 스펜서/스튜어트가 무려 4년 6개월 동안 전국을 뒤져 발렌티의 후임을 물색한 끝에 결정됐다. 그는 "나의 열망은 국제영화계에서 MPAA의 역할을 지속시키고 확대시키는 것"이라며 "미국의 가장 바람직한 수출산업인 미국 영화를 위해 국내외의 새 동료들을 비롯 의회, 연방정부 및 모든 대륙의 국가 관계자들과 긴밀한 협력을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리크먼은 "할리우드에서 성공적으로 경력을 쌓고 있는 아들을 통해 영화계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며 "오랫동안 영화산업에 깊은 애정을 품어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18년 동안 의회 의원으로 봉직하며 대부분 기간을 법사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다. 저작권 및 지적재산소위 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1995년 글리크먼은 농무장관에 임명돼 6년 동안 봉직하면서 600억달러 이상의 연간예산과 10만 직원을 감독하는 직책을 수행했다. 장관 재임 기간 그는 미국 정부와 농업분야를 위한 강력하고도 성공적인 옹호자란 평판을 얻기도 했다.(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