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국내뉴스
뒤로 가는 한국드라마 완성도

상투성의 ‘상투’ 벗어던져라

한국 드라마, 요즘 그럭저럭 잘 나간다. 다음주 끝나는 문화방송 <불새>와 얼마전 끝난 한국방송 <백만송이 장미>는 전체 시청률 1위를 주고받았다. 에스비에스 <파리의 연인>은 3회 만에 시청률 30%를 훌쩍 넘어섰다. 새로 시작한 문화방송 <황태자의 첫사랑>은 차태현과 성유리의 ‘스타 파워’를 업고 순항을 예감케 하고 있다. ‘욘사마’(배용준의 일본 내 호칭) 신드롬을 부른 일본의 <겨울연가> 열풍도 가실 줄 모른다.

그러니 이쯤에서 한국 드라마의 위기 조짐을 읽어내려 한다면, ‘섣부르다’는 평가가 나올지도 모른다. 상투적이고,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잡아채지도 못하며, 완성도도 떨어진다고 싸잡는다면, 드라마에 따라붙는 흔한 비판일 뿐이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시청률이 웅변하는데, 웬 딴죽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래도, 요즘 한국 드라마가 위기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발칙한’ 시각은 엄연히 적지 않다. 한국 드라마가 올해 들어 부쩍 조로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적색경보다.

한국 드라마의 퇴행성은 비슷한 문화 장르인 한국영화의 약진과 비교할 때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경우 낮은 완성도는 가장 직접적인 위기 징후로 꼽힌다. 드라마 연출자들은 드라마에 영화의 완성도를 기대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한국영화에 ‘중독’된 시청자들은 눈높이가 다르다.

이 점에선 최근 드라마 가운데 가장 시원하고 세련된 화면을 자랑하는 <파리의 연인>도 예외가 아니다. 4회에서 수혁(이동건)은 태영(김정은)을 만나기 위해 귀국 비행기에 오른다. 그러나 수혁이 탄 비행기 안 풍경은 누가 봐도 결코 비행기가 아니었다. 복도는 1등칸보다 훨씬 넓어 현실감이 떨어졌고, 좌석은 마치 대합실 의자 같았다. 영화를 그렇게 만들었다면 환불 소동이 벌어졌을 법하다. 송교섭 우석대 영화학과 겸임교수는 “<불새>고 <파리의 연인>이고 연기며 세밀한 완성도가 눈에 띄게 떨어져 전혀 그럴 듯해 보이지 않는다”며 ‘웰메이드’가 흥행에 큰 요소로 작용하는 한국영화에 비해 드라마는 여전히 ‘웰메이드’와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왕꽃선녀님>과 <금쪽같은 내 새끼> 같은 일일연속극에선 아예 내놓고 드라마 작가들의 ‘자기복제’가 이뤄지고 있다. 드라마를 보다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에피소드가 자주 등장한다. 특히 <왕꽃선녀님>의 경우 김성택 김용림 한혜숙 등 <인어아가씨>의 주력 멤버들이 그대로 출연해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한국방송의 드라마 피디 ㄱ씨는 “자그마한 에피소드의 반복 정도는 쉽게 용납되다 보니, 이제는 일일극뿐 아니라 주말극과 주간 미니시리즈까지 새로운 디테일의 개발보다는 쉽게 가자는 쪽으로 퇴행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불새>, <파리의 연인>등 시청률은 잘 나가지만 반복되는 에피소드 난무하는 신데렐라 이제 그만할때도

신데렐라 스토리의 변주만을 되풀이하는 이야기의 상투성도 중요하게 지적된다. 올해 들어 잘 나가는 드라마는 온통 재벌가 왕자와 가난한 미녀의 ‘러브 판타지’가 지배하고 있다. 드라마 매니아인 소설가 박현욱씨는 “드라마가 으레 그런 것 아니냐”면서도 “2002년엔 <네 멋대로 해라>가, 2003년엔 <다모>와 <앞집여자> <대장금>이 색다른 즐거움을 안긴 반면, 올해는 <꽃보다 아름다워> 정도를 빼곤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점 역시 한국영화와 크게 비교되는 지점이다. ㄱ 피디는 “한국영화는 ‘조폭코미디’라는 흥행공식 말고도 사회적 의제를 다루거나 가치관 변화를 짚는 등 다양한 실험들이 일어나고 있는 반면, 요즘 드라마의 리얼리티는 불륜 소재에서나 드러날 뿐, 이야기 구조는 뻔한 스토리의 반복”이라고 질타했다.

물론 다른 견해도 있다. 대중문화평론가 강명석씨는 “지난 2년 동안 엠비시 주도로 새로운 스타일을 내놓았다면, 올해는 그런 새로움이 안정화되는 단계”라며 조심스런 접근을 주문했다. 그는 “올해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나 <천생연분> 같이 괜찮은 평가를 받은 드라마가 없지 않다”며 “이런 것들은 작년 <앞집 여자>의 스타일이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또 <발리에서 생긴 일>이나 <불새> 등은 기존 신데렐라 스토리이면서도 ‘해피앤드’의 전형적 공식을 뒤집음으로써 연애심리극의 성격을 강화했다고 지적했다. 비극적 색채를 가미해 ‘김수현식 드라마’의 새로운 느낌을 던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해석을 따르더라도 올해 한국 드라마가 장르화한 공식 안에서의 내적 변주에 머물렀을 뿐이라는 비판은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유효하다. ㄱ 피디는 “이야기 변화라는 것도 전보다 갈등구조가 훨씬 날카로워지고 팩트들이 세졌다는 느낌”이라며 “‘할리퀸 로맨스’ 서너권 섞어놓으면 나오는 얘기 아니냐”고 했다.

송교섭 교수는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드라마의 퇴행 조짐과 징후를 한층 적극적으로 읽어내고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이대로 익숙한 공식만을 되풀이하는 관행이 굳어지면 대중문화 선도 장르로서의 활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드라마는 주시청자가 30대 이상 여성이다 보니 ‘러브판타지’에 종속되는 경향이 강하고, 인력과 자본 유입으로 달라진 영화판과 달리 드라마 제작환경이 달라지지 않은 탓에 새로운 시도가 어려운 점이 있다”며 “영화감독을 드라마 연출에 기용하는 등 관행을 깨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 드라마가 위기라는 것은 너무 앞선 경고일 수도 있다. 강명석씨는 “모든 드라마가 <다모>나 <대장금> 같을 순 없으며, 하반기에라도 성공한 실험작이 나올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전복을 시도하려면 상투성을 깨려는 의지와 각오가 먼저 필요하다. 지금 한국 드라마가 상투성의 늪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경보음에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