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에서 88년은 어른들을 위한 새로운 만화가 활발하게 창작된 해로 기억된다. 이현세, 허영만, 한희작, 이두호, 김형배 등의 중견 작가들은 물론 이희재, 오세영, 박흥용 등의 신진 작가들이 함께 진지한 만화를 연이어 발표했는데, 1985년 12월 창간된 <만화광장>과 1987년 5월에 창간된 <주간만화>가 좋은 터전이 되었다. 만화가 만화방이라는 막힌 공간을 탈출해 잡지를 통해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가던 때, 젊은 작가들은 단편을 통해 힘없고 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시사만화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사회와 역사에 대한 만화가 처음 등장하던 시기였다. 이희재와 오세영의 단편은 각각 <간판스타>와 <부자의 그림일기>라는 단편집으로 묶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시절 가장 빼어난 단편작가 중의 한 사람인 박흥용의 작품은 그저 기억 속에서만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박흥용은 86년부터 92년까지 <만화광장>과 <주간만화>를 넘나들며 인간의 상처에 대해, 가난의 슬픔에 대해, 그리고 암울한 시대에 대해 발언하는 작품을 여럿 발표했다. 박흥용 하면, 1995년 <투엔티세븐> 창간호부터 연재를 시작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과 그 이후 일련의 작품으로만 기억될지 모르지만 실은 80년대 초반부터 한국 만화의 표현과 주제의 영역을 확장시켜간 작가로 손꼽힌다.
이번 단편집은 86년에서 92년까지 주로 <만화광장>과 <주간만화>에 발표한 18편의 단편을 묶어 청년사에서 나왔다. 초기 작품의 치열한 고민과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읽어낼 수 있는 작품들이다. 10년이 넘은 작품이라 최근에 보여주는 안정된 박흥용류의 맛은 없지만 오히려 젊고 힘이 넘치는 선과 그에 걸맞은 고뇌를 읽을 수 있다. 18편의 작품들이 갖는 일관된 특징은 ‘돌아봄’이다. 박흥용은 이웃에 대해, 나에 대해, 역사에 대해, 도시에 대해 끊임없이 돌아보고 질문한다. 그래서 칸 안에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그 시대의 진지한 풍광에 도달한다. 철거되는 판잣집, 시멘트 포대를 사 가루를 털어내는 삼양동, 경찰서 유치장, 이태원의 밤거리, 옥탑방, 교통사고 환자들이 모여 있는 작은 병실.
한국 만화에서 의도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던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그 공간을 차지하고 복작거리고 사는 사람들을 돌아본다. 애정이 넘치는 시선으로 돌아본 결과는 단편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약한 자들이 서로를 돌아보고, 그리고 보듬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한국 만화가 바라보지 않았던 그들의 모습이다. 좋은 책을 멋지게 만들어낸 출판사에 덕담 한마디 보탠다.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