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 <효자동 이발사>에서 포스트-386의 희망을 보다
효자동 이발소에 가고 싶다. 안마사 문소리 때문이 아니다. 송강호에게 머리를 깎아보고 싶어서이다. 대한민국 일번지 강남의 이발소들이 가위를 버린 지 오랜 이 땅에 가위 하나로 폭력의 시대를 이겨낸 효자동 이발사 아저씨. 그에게 머리를 맡기면 좌우 어느 쪽으로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 철사 같은 내 머리카락도 순순히 아저씨의 이팔 가르마에 순응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정성 성(誠)씨 가문의 후손인 아저씨는 홀리(holly) 성(聖)으로 겁주지 않고, 섹스 성(性)으로 유혹하지 않으면서 정성 하나로 머리카락을 길들이는 고수이기 때문이다. 그의 손길에는 독재자도 항거불능이어서 날선 면도칼 아래 순순히 목을 내밀지 않던가.
효자동 이발사의 특기는 ‘정 주고 뺨 맞기’지만 사실 그건 발언권을 얻기 위한 전략이다. 진짜 그의 특기는 목소리 큰 가짜 ‘깎쇠’들이 설쳐대는 바람에 봉두난발이 된 한국 근대사를 예쁘게 깎아 가르마 타주기이다. 그는 먼저 “열심히 일했다”를 발언권의 근거로 30년 이상 다른 발언을 금지했던 개발독재의 논리를 싹둑 자른다. 그는 “나도 열심히 일했지만 내게 돌아온 건 상처밖에 없으니 그건 뻥이다”라고 개발독재의 논리가 열심히 일하지 않은 자들의 사기극이었음을 밝힌다(물론 이 사기극은 현재에도 박정희의 유령을 주연으로 캐스팅해 삼류극장에서 시도 때도 없이 앙코르 공연을 하고 있다). 그 다음 그는 가르마를 타는데, 어쩐지 ‘열심히 일했다’의 반대편인 ‘열심히 싸웠다’쪽으로 훌쩍 넘어가지 않고 망설인다. 이미 가고 없는 적의 유령을 불러내어 무용담을 늘어놓는 이쪽도 미심쩍었던 모양이다(하긴, ‘열심히 싸웠다’는 학생회장 출신들이 모조리 열린우리당 아니면 한나라당에 가 있는 걸 보면 이 무용담이 이미 철지난 유행가 같기도 하다. 그래도, 최근까지 이 무용담은 ‘열심히 일했다’를 침묵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가장 확실한 발언권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열심히 싸운다’고 몸으로 보여주는 액션 극단 민노당이 무대에 올라오면서 전사 인형 뒤에서 무용담을 늘어놓던 변사들은 입이 더욱 바빠지게 생겼다). 어쨌거나, 효자동 이발사는 좌우 가르마를 포기하고 올백으로 방향을 결정함으로써 근대사를 전혀 색다른 스타일로 깎아놓는다. 올백은 ‘열심히 일했다’와 ‘열심히 싸웠다’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구도 자체를 의심한다. 혹시 이 구도 안에 정작 심히 일한 자와 열심히 싸운 자는 다 빠지고 케케묵은 한강의 성공신화와 상하기 시작한 무용담만 남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이다. 올백은 총칭 박정희 세대와 386세대의 대립구도에서 어느 쪽에도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적 관점을 상징한다. ‘효자동 이발사’에서 내가 인상 깊게 본 것은 386이후 세대의 조심스런 정치적 발언이다. ‘열심히 일했다’와 ‘열심히 싸웠다’에 밀려 ‘열심히 공부했다’고 목소리 내지 못했던 이 세대가 바라보는 한국의 근대사, 그리고 거기서 유추되는 정치적 감수성은 무척 흥미롭다.
이 영화에서 박정희는 경제성장 공로상을 주든지 독재자의 낙인을 찍든지 서둘러 역사 속으로 흘려보내야 할 과거의 흔적이다. 박정희의 영정에서 도려낸 눈을 국화와 함께 끓인 탕약을 먹고 서야 고문후유증으로 마비됐던 ‘낙안’의 두 다리는 움직인다. 박정희의 유령을 보내고 나서야 새로운 세대는 역사의 질곡을 넘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박정희를 역사 속으로 보내는 것은 ‘투사’가 아니라 효자동 이발사이다. 그는 아무런 정치적 신념이 없던 무구한 ‘깎쇠’였다. 하지만, 아들로 인해 혹독한 체험을 하면서 스스로 ‘의식화’된다. 그래서, 더이상 정치적 구호에 동원돼 무엇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게 됐지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확신하는 정치적 신민이 된다. 그는 대머리인 2대째 각하에게 “머리가 다 자라면 다시 오겠다”고 말한다. 남들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신의 노동의 의미를 내세워 국가의 동원을 거부한 것이다.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조금 발언하지만 무엇을 위해 발언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 가장 소박한 노동을 통해 사나운 노예에서 온건한 주체로 성장한 사람. 효자동 이발사는 우리 정치에서 결핍된 무언가를 호명한다. 요란한 음향효과가 아닌 소박한 실천을 위해 구호에 짓눌려 있던 그대들의 발언권을 찾으라는 것. 난마 같은 한국 근대사의 지형에서 가족주의, 집단주의, 감상적 휴머니즘의 늪을 아슬아슬 비껴가며 ‘개인’과 ‘정치’를 연결하는 그 감수성이 놀랍다. 너무나 개인적이면서 정치적인 영화! 이건 분명 희망이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 commat@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