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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로부터 신화 만들어내기, <킬 빌>

<킬 빌>, 팝을 이용하는 타란티노 최고의 기교

물끄러미 TV를 본다. 까불까불, 훌쩍훌쩍, 드라마, 광고… 퇴근한 우리는 지쳐 있고 화면은 그저 스쳐 지나간다…. 멍하니 라디오를 듣는다. 뉴스, 토론, 청취자 전화 연결, 옛 노래, 새 노래, 인터뷰, 교통정보… 그저 소리들이 흘러간다. 길이 너무 막힌다….

그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 TV를 보다가 너무 어이가 없어 쳇, 하고 냉소를 보내면 보낼수록,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지긋지긋한 것들을 일부러 저장하지 않는 한 자동으로 쓰레기통 처리되는 무의미한 기호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그 멍청한 화면들, 떠들썩한 소리들은, 우리의 머리통을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기능을 한다. 그 무의미한 것들이 머리 속 깊은 기억의 우물에 차곡차곡 쌓인다. 팝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머리는 쓰레기통이다. 누구나 무의식 깊은 곳에는 무심코 지나친 그림들, 소리들이 황학동 벼룩시장의 옛날 물건들처럼 쌓여 있다. 팝의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수동적인 이미지 컬렉터, 사운드 컬렉터가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그것들이 그저 내 옆에, 내 앞에, 모든 곳에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통, 혹은 팝의 시대

누군가 오래전부터 쓰레기통을 뒤지는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열고 내다본다. 그런데 쓰레기통의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난지도보다도 더 크다. 약간 대머리가 벗겨지려 하고 얼굴은 조금 늙어가지만 여전히 장난꾸러기 같은 입매무새를 하고 있는 남자가 사다리를 놓고 열심히 쓰레기통 속을 오간다. 오, 타란티노씨. 오늘도 작업 중이시다.

그 속에서 30년 전의 이야기를 꺼낸다. 매운 먼지가 풀풀 날리는 그 이야기는 낡은 싸구려 종이뭉치 위에 적혀 있다. 아니, 정확히는, 종이가 되기 이전의 거친 상태인 ‘펄프’ 위에 적혀 있다. ‘소설’(novel)이라기보다는 그 이전 상태의 그냥 ‘썰’, 픽션(fiction)이다. 하드하고 감각적이고 막무가내며 예술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쓰레기통 옆에 앉아서 그 쓰레기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낄낄댄다. 혼자 낄낄대다가, 그는 길바닥에 덧없이 손가락 글씨를 써본다. ‘펄프 픽션’… 타란티노는 그 쓰레기통 속의 것들을, 다시 말해 우리 머리통 속에 쌓여 있는 먼지 쌓은 것들을 자기 맘대로 이리저리 조합해본다. 그것들도 다시 이야기가 된다.

이래서 그의 이야기는 삶이 필요없다. 삶을 반영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영화가 영화를 반영한다. 그것은 일종의 게임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삶, 쓰레기통 속의 삶, 팝 세상의 삶이므로 그 자체가 다시 삶의 반영이 된다. 데이비드 린치가 로이 오비슨을 모시고 나와 쓰레기통 속의 타란티노를 격려한다.

이번에는 타란티노가 오래된 중고 라디오 하나를 건진다. 치치직, 라디오를 튼다. 어랍쇼. 1970년대에 FM을 풍미했던 DJ가 나와서 부드럽게 멘트를 친다. 우리로 치면 피세영쯤 되나. DJ가 음악을 하나 선곡한다. 〈Stuck in the Middle with You>. 주옥같은 곡이다. 1973년, 스틸러 휠이라는 영국 밴드가 히트시킨 노래. 물론 이 밴드의 히트곡은 달랑 이 곡 하나. 멤버인 제리 래퍼티는 나중에 〈Right Down the Line>으로 세련된 어덜트 취향의 FM 록을 대표한 뮤지션의 한 사람이 된다. 다음 선곡은 〈Hooked on a Feeling>. 원래 1960년대 말 B. J. 토머스가 부른 원곡이 있지만 DJ가 트는 것은 원곡에 필적할 만큼 히트한 1974년 곡, 스웨덴 출신 록 밴드 ‘블루 스웨드’의 것이다. 한마디로, 오리지널의 힘을 지닌 듯 하지만 약간은 ‘짝퉁’이다. 타란티노는 바로 거기에 감탄한다. 오리지널의 힘, 그런 것은 타란티노에게 애초부터 없다. 오히려 ‘짝퉁의 힘’이 타란티노를 감탄시킨다. 아! 이 짝퉁!

짝퉁의 뒤통수-‘배반’의 스타일화

〈Stuck in the Middle with You>나 〈Hooked on a feeling>이 쓰인 영화는 <저수지의 개들>. 특히 앞의 노래는 그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장면에 나왔던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1970년대 중반, 힘 빠진 록이 팝이 되어 번지르르, 세련된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던 시절. 곧 그것들은 쓰레기 취급받았다. 왜? 겉만 번지르르하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 쓰레기통 저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그 70년대 LP들은 경이로운 녹음과 편곡을 가지고 있다. 재킷 디자인도 쓰레기치고는 너무 빼어나다. 지금의 쓰레기에 비하면, 정말 문자 그대로 예술이다.

1970년대는 한마디로 세련된 ‘짝퉁’의 시대다. 록에 국한시켜서 말하자면 1960년대가 오리지널이고 1970년대는 그 세련된 반복일 뿐이다. 타란티노는 그 시대의 산물이 가지는 본질적인 덧없음을 이용한다. 그것도 거꾸로. 어찌 이 유려하고 달콤하며 감정을 많이 자극하지도 않는 노래를 타란티노는 그토록 잔인한 장면에다가 쓴단 말인가. 그 쓰레기들을 듣는 놈의 귀를 잘라버려야 마땅하다는 듯, 영화 속에서 고문당하던 불쌍한 인물의 귀가 잘려 나간다. 그러나 멜로디는, 다시 들으니 너무 좋다.

타란티노는 그 쓰레기들을 선별한다. 라디오에서 너무 많이 나와 문자 그대로 ‘닳고 닳은’ 노래들은 아무리 좋아도 쓰지 않는다. 그것들은 힘이 없다. 단물이 다 빠졌기 때문이다. 대신 타란티노는 살짝, 귀를 스쳐가듯 한 시절을 풍미했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의 마음속에 더 파고들지 못하고 사라진 노래들을 고른다. 그것들은 기억 속에 들어 있는 쓰레기들이면서 아직 신선하다. 사람들이 다시 감동하기 시작한다. 아, 그런 시절이 있었지. 노래는 3분이면 3분, 바로 그 시간만큼 흐르는 얼마간의 시간이다. 1970년대의 노래가 흐르면 저절로 그때의 시간이 스스로 태엽을 감아 흐른다. 마음이 그때로 돌아간다. 그러나 바로 그 때, 타란티노는 그 ‘추억’의 언저리에서 배회하는 보통 사람들의 감회를 배반한다. 귀를 잘라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묘한 기분에 빠지고 만다. 따뜻하고 안전한 추억의 공간과 그것이 난도질당하는 현장이 겹친다. 다시, 환상은 깨지고 그것들은 애초의 쓰레기 상태로 돌아간다. 그 순간, 바로 그 순간만 사람들은 팝의 세계에서 튕겨져 나와 자기 머릿속을 본다. 머릿속은 쓰레기통이다. 그리고 다시, 평소에 하던 대로, 멍하니 쓰레기통 뚜껑을 벌리고 팝을 먹는다. 뚜껑이 열리고, 타란티노가 그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짝퉁은 더 달콤하거나 더 시다. 총 한방 쏘면 될 것을 머리에 대고 난사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제대로 취급받지 못하고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짝퉁은 과도하거나 모자란다. 적당한 적이 없다. 그래서 약간은 우습다. 새뮤얼 L. 잭슨이 읊는 성경구절은 짝퉁이다. 얼마 동안, 흑인들을 위한 흑인들의 영화인 이른바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들은 짝퉁치고도 구제불능인 짝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타란티노는 1970년대의 쓰레기통 속에서 그것들을 꺼내며 감탄, 또 감탄! 예술의 ‘o’자도 생각하지 않는 그 단호함, 누구는 칸에 못 갈까봐 잠도 안 오는데 그와는 정반대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것을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야심 제로의 그 텅 비운 마음! 죽일 때 콱 죽이고 확인사살까지 하며 여자랑 잘 때가 되면 빼거나 슬쩍 넘어가지 않고 원없이 자주는 그 짤없음!

바로 이런 것들이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힘이다. <잭키 브라운>은 철저하게 그 오마주라 할 수 있다. 물론 그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영화가 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에 ‘대한’ 오마주이기 때문에 타란티노도 순간적으로 긴장한다. 그래서 고증에 신경쓴다. 거기서 약간은 삐끗한다. <잭키 브라운>의 O.S.T는 1970년대의 흑인음악에 관한 좋은 컬렉션이다. 그러나 너무 신경썼다. 함정일지도 모른다. 짝퉁처럼 보이려고 너무 신경을 쓰다니!

그래서 그의 ‘의도된 짝퉁’은 원래의 블랙스플로이테이션과 약간의 거리감이 생긴다. 블렉스는 주장하지 않지만 타란티노는 은근히 주장한다. 바로 이거야! 라고. 너희들이 연연해하는 것을 생각지도 않는 이게 바로 쿨한 거 아니겠냐, 라고. 그렇게 힘줘서 무거워진다. 무거워지면, 정확히는 무거워지는 것이 보이면, 타란티노 같은 스타일로서는 한마디로 끝이다.

<킬 빌>, 쓰레기의 신화화-차용의 기교

그래서 타란티노가 오랫동안 기다린다. 더 연마한다. 정확히는 쓰레기통 속에서 더 오랫동안 칩거한다. 마치 빌을 죽이려는 브라이드가 오랫동안 수련기를 거치듯, 타란티노는 갈고닦는다. 오랫동안 별러왔던 사무라이들과 쿵후 명인들한테 한수 배운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하토리 한조가 만든 최고의 검처럼, 그의 쓰레기들이 마스터 피스가 되려 한다. 그 유일한 길은, ‘신화화’하는 것이다. 타란티노에게 신화화하는 것은 ‘놀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삶을 떠나 가벼워진다. 연기처럼 덧없는 그것이 신화다. 미국 문화는 쓰레기의 문화다. 짝퉁의 신화화는 다름 아닌 미국 문화의 신화화다. 사람들은 <킬 빌 Vol.2>를 동양의 스타일화된 영화언어에 대한 오마주로 읽지만 어쩌면 타란티노가 노린 것은 그 정반대일지 모른다. 그는 스타일화된 온갖 짝퉁 중에서도 최고로 스타일화된 일본 것, 짝퉁 중의 짝퉁인 중국 것을 가져다가 결국은 자기 문화의 신화화를 위해 쓴다.

<킬 빌 Vol.2>를 보고 나면, 이 영화가 결국 ‘총싸움 놀이’를 하던 미국 문화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킬 빌>의 전체 구조는 바로 총싸움 놀이하던 어린 시절과 현실의 비극을 대조시킨 낸시 시내트라의 노래 〈Bang Bang(My Baby Shot Me Down)>에서 고스란히 나온다. 기가 막힌 선곡이다. 이 노래는 그 자체로 팝의 신화를 암시한다. 프랭크 시내트라의 딸인 낸시는 처음부터 팝의 최고봉이었고 팝의 제물이었다. 이 대목에서 타란티노와 데이비드 린치가 다시 겹친다. 그들은 모두 팝 세상의 비극적 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킬 빌>은 팝을 이용하는 타란티노 최고의 기교들을 보여준다. 엔카, 팬 플루트, 테크노, 라틴, 모든 것이 진짜 쿵후의 현란한 품세처럼 자유자재로 버무려진다. 물론 여전히 쓰레기들이다. 액션 밑에 치정을 깔고 치정 밑에 모성을 깐다고 해서, 쓰레기들은 과연 비극적으로 신화화될까. <킬 빌>은 위험하다. 낸시 시내트라의 노래처럼 그는 바로 자기 ‘베이비’인 쓰레기들에게 총을 맞아 쓰러질지도 모른다. 쓰레기는 잔인하다. 배신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타란티노는 위험을 무릅쓰고 카드를 던진다. 혹시 타란티노가 잘못 계산한 것일까. 아랑곳없이, 타란티노는 오늘도 쓰레기통 속에서 논다. 결국은 팝 세상을 사는 미국인들(에다가 그 영향권에 있는 전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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