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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격랑에 떠밀린 한 남자의 젊은 날, <하류인생>

1950년대 후반 자유당 정권 말기부터 1970년대 초반 유신체제 수립까지 한국 현대사를 배경 삼아 한 남자의 젊은 날을 클로즈업한 임권택 감독의 새로운 경지

삶은 기대를 배신한다. 최선을 다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있고 아무리 거스르려 해도 휩쓸리게 되는 파도가 있다. 그러다 어디로 가는 건지 둘러볼 때는 이미 늦었다.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벌써 지났다. <하류인생>의 주인공 태웅은 자존심 센 건달이지만 배고픔 앞에선 무릎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의리를 믿고 살았지만 대신 감옥에 간다고 영웅이 되는 건 아니었다. 정치를 몰랐지만 그런다고 정치가 그를 피해갈 리 만무했다. 적당히 더러워지고 은근슬쩍 타협하면서 오욕의 세월을 살아낸 남자, 그는 결국 정보부 요원들에게 쫓겨 전경과 시위대가 대치한 한복판에 떨어진다. 10여년 전 폭력조직간의 싸움에서 그랬듯 태웅은 간신히 몸을 숨겨 어쩔 수 없이 다시 살아갈 내일을 맞는다.

단적으로 물어보자. 이것은 비극인가? 자유당 정권 말기부터 유신시대까지 건달로, 영화제작자로, 군납업자로 살았던 사내의 인생에서 비참하고 서글픈 심정을 경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박하사탕>의 영호와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러나 <하류인생>은 비극이 아니다. 탄식하고 애도하고 안타까워하는 대신 감독은 태웅의 삶에서 코미디를 목격한다. 시대 자체가 희극이었기에 여기엔 더하거나 뺄 것이 없다. 따로 기승전결의 드라마를 구성하지 않고 그저 수많은 사건을 나열하기만 해도 <하류인생>에는 비애가 잉태한 해학이 가득하다. 여기서 웃음은 그 시대를 살았던 감독이 과거를 돌아볼 때 생기는 거리감과 통찰에서 비롯된다. 롱숏이 많지 않아도 영화 전체가 태웅의 삶을 멀리서 지켜보는 듯한 이유일 것이다. 이 영화에는 진짜 놀라운 것이 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영화라는 사실이다. 임권택 영화의 특징이었던 롱테이크를 이 영화에선 찾아볼 수 없다. 장면과 시간이 훌쩍훌쩍 예기치 못한 곳으로 질주하는 순간, <하류인생>이 펼쳐보이는 인생의 파노라마는 예리하게 다듬은 단문들로 이뤄진 장편소설을 연상시킨다. 그 효과는 거장의 문체가 어떤 건지를 입증한다. 태웅은 세월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몰랐던 사람이다. <하류인생>의 속도감은 태웅을 떠밀고 가는 격랑처럼 보인다. 이건 고뇌하는 예술가를 다룬 <취화선>과 전혀 다른 방식이며 임권택의 다른 영화들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하류인생>은 임권택 영화의 새로운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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