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 <바람의 전설> 을 보고 낡은 몸 담론에 대해 생각하다
나는 ‘봄’이 좋다. 봄은 단아하면서도 미세한 서성거림이 있다. 묵은 기운을 흘려보내고 새 기운을 받아들이는 행사를 그렇게 온화하게 치러낼 수 있다니! 그래서인지, 나도 봄바람을 맞으면 겨우내 가시를 돋우었던 마음의 옹이도 새순으로 변한다. 봄은 묵은 시간의 쳇바퀴 속으로 새로움이 회귀하는 소리없는 춤처럼 느껴진다. 말없던 지상의 모든 생명이 일제히 자신의 존재증명을 하는 침묵의 군무. 수다쟁이 인간도 말을 반납하면 저 춤의 대열에 낄 수 있을까? 행여 모를 일이다. 4월에는 시금치처럼 입을 닫고 봄바람에 자빠트려져볼 일이다. 몸이 하는 말이 들릴 때까지 드가처럼, 드가처럼 열심히 춤을 몽상해볼 일이다.
언제 처음 춤을 추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춤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불온 삐라처럼 드문드문 파편으로 박혀 있을 뿐 온전한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때, 포크댄스라는 걸 전교생이 마당에 모여 했다. 아침 조회 끝나고 군대식 열병으로 교실로 들어가던 그때에 왜 미국의 민속춤을 가르쳤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마도, 몇년 뒤에 배우게 될 국민체조, 제식훈련, 총검술 등의 워밍업이 아니었을까? 고등학교 때 교련복 입고 친구 자취방에 가서 당시 유행하던 팝송 ‘뒷골 땡겨’(Dizzy)에 맞춰 ‘고고’(Go Go)를 방구들이 내려앉도록 연습했다. 소풍날 공연을 했는데, 다음날 학교 와서 학생과장에게 엄한 문초를 받았다. ‘반장이 진로포도주에 불량한 춤까지!’ 대학에 들어와서는 같이 자취하던 친구가 열혈투사가 되는 바람에 ‘해방춤’을 배웠다. 그런데, 안무가 시원찮아서 해 떨어지면 종로의 디스코텍에 가서 디스코와 블루스를 별도로 학습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친구의 혹독한 비판에 스텝이 자주 엉켜서 그 짓도 그만둬버렸다. 그 이후 춤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대학 때 배운 막춤을 응용해 근근이 사회생활에 적응해왔다.
돌이켜보면 한번도 내가 춘 춤의 사위는 내 몸을 편안하게 받아주지 못했다. 춤은 언제나 노래보다 조금 더 억압당했고, 세미나보다 많이 핍박받았다. 70년대에는 노동 착취를 위한 군사문화의 규율이 유연한 몸을 용납하지 않았다. 80년대는 그 규율을 깨기 위한 집단적 행진에 자유로운 스텝이 딴죽 걸렸다. 혼자 추는 춤의 사위가 이럴진대, 남녀가 두손을 맞잡은 사교댄스의 세계는 오죽했을까. 춤도 불량한데, 거기에 남녀상열지사까지, 이건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국가보안법 사안이 아닌가!
권력이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권력없이 행복한 인간이 활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동원의 논리가 허구라는 사실을 가장 설득력 있게 반박하는 살아 있는 물증이다. <바람의 전설>의 주인공인 박풍식이 언뜻 보면 이런 인물 같다. 그는 자칭 ‘무도예술가’ 타칭 ‘제비족’이다. 춤이 좋아서 팔도를 주유하며 무예를 닦고 하산한 뒤로는 카바레에서 춤 자체의 쾌락에 인생을 건다. 여자들에게 받는 돈은 부수적 효과이다. 그러니, 그의 주장대로라면 전문적으로 인생을 탕진하는 무익무해한 쾌락주의자인 셈이다. 그런데, 사실은 아니다. 그는 제비족일 뿐만 아니라 내면 연기에 익숙한 사기꾼이다. 진정한 사기꾼은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도 자신이 하는 거짓말을 진심으로 믿는 훌륭한 연기자이다. 감독은 이 연기를 “나는 믿는다”고 말하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지만, 사실은 몸을 억압해온 그 강고한 편견과 싸울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냥 먼발치에서 “박풍식은 예술가”라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하는 정도이지, 박풍식을 위한 변론서를 써서 뛰어다니는 노고는 사양한다.
그래서, <바람의 전설>은 오랜 시간 역사적 한파에 얼어붙은 몸에 봄바람을 불어넣는 해방춤 같지만 사실은 춤처럼 안무된 제식훈련으로 끝나고 만다. 정치적 담론에서 해방을 선언하자마자 소비주의에 포획된 요즘의 사물화된 몸들이 벌이는 매스게임. 이게, 춤이라면 이 춤의 스텝은 쿨한 성적 교환을 준비하는 몸짱의 웰빙 라이프 행진곡에 조율돼 있다. 설마 이게 해방된 몸의 안무는 아니겠지. 정치판에서도 노동하는 몸이 10석이나 국회로 진출한 이 봄에 해방된 몸뚱어리 하나 그려 보이지 못할 만큼 우리 영화의 몸은 구식 담론에 짓눌려 있는 게 아닐까. 역시 문제는, 진정 해방되어야 할 것은, 입이 아니라 몸이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 commat@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