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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섹스&시티>? MBC <결혼하고 싶은 여자>
2004-05-07

팍팍한 인생 경쾌한 풍자, 젊은 여성들의 자기 이야기

지난달 21일 시작한 문화방송 수목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극본 김인영, 연출 권석장)는 제목만 봐서는 그저그런 또하나의 드라마로 짐작하기 쉽다. 결혼을 두고 밀고당기는 뻔한 스토리를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20, 30대 젊은 여성들의 트렌디가 있다

기존 드라마가 배역이나 줄거리에서 젊은층을 대상으로 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드라마 주 소비층인 40, 50대 아줌마들을 겨냥한 것이 대부분이다. 방송사로서는 텔레비전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중년 여성들의 입맛에 맛는 드라마를 만드는 게 시청률에서 안전하다. 지고지순한 사랑이니,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러브팬터지’가 판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20, 30대 젊은 여성들에게 자기 이야기 같은 드라마는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모처럼 젊은 여성들의 트렌드와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한, 이 시대의 진정한 트렌디 드라마라고 할 만하다. 지난해 같은 문화방송에서 방영됐던 〈옥탑방 고양이〉나 〈앞집여자〉와 같은 계보라고 할까.

남자 친구한테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차인 뒤 결혼할 남자를 찾는 방송사 여기자 신영(명세빈), 병든 아버지에 뺑덕어멈 같은 과부 고모와 고모딸까지 부양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돈도 없고 남자도 없는 순애(이태란), 재벌가로 시집갔으나 남편에 맞서 맞바람을 피우다 파란눈의 아이를 낳은 죄로 시집과 친정에서 쫓겨난 연애박사 승리(변정수) 등 32살 동갑네기 세 친구의 내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가 경쾌하면서도 때론 가슴 찡하게 그려진다.

시청자 고미숙씨는 “31살 노처녀입니다. 오랜만에 나를 웃게 해준 것 같아 고마웠어요”라고 이 프로그램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유숙희씨는 “20대는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고, 30대는 현재를 보며 공감하고 40, 50대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런 드라마 때문”이라고 소감을 남겼다. 20, 30대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는 시청자 분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20% 미만이지만 세대별 시청점유율을 살펴보면 20대 여성과 30대 여성의 시청 점유율이 각각 33%, 30%로 드라마 주력 소비층인 40대와 50대 여성의 시청점유율(각각 23%, 21%)보다 높다고 시청률 조사기관인 티엔에스는 밝혔다.

경쾌함과 쓸쓸함, 세태풍자가 있다

이 드라마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 중 상당수는 “연기자들의 오버도 너무 재밌다” “다뤄지는 이야기들이 무거운데 유쾌함으로 풀어내는 것 같다” 등 드라마가 내세운 웃음의 코드에 적극 반응하는 내용들이다. 사실 그동안 다소곳하고 현모양처 같은 배역만을 맡아 내숭덩어리 이미지를 갖고 있는, 신영 역의 명세빈이 눈꺼풀을 연신 깜빡이며 결혼하고 싶은 남자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연기에 웃음이 터져나온다. 지난해 〈앞집여자〉에 이어 연애박사로 나오는 변정수의 화려한 몸짓도 경쾌하다. 신영과 준호(유준상)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헤어진 이후 20여년 만에 다시 만나는 장면도 다른 드라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항문이 부어 병원을 찾아간 명세빈의 항문에 손을 집어넣은 사람이 다름아닌 유준상이라는 설정은 차라리 이 시대의 엽기코드와 맞닿아 있다.

“너무 오버하는 것 아냐”라는 느낌도 들지만 바로 내숭을 떨지 않는 게 이 드라마의 미덕이자 매력이다. 노골적으로 조건에 집착하는 남녀관계를 드러냄으로써 뒤틀린 관계맺기를 풍자하기도 한다. 치과의사인 남자 친구로부터 “나이 많고 고집 세다”는 이유로 차인 신영은 준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육탄공세를 서슴지 않으나 그는 띠동갑 연예인을 소개시켜달라는 둥 철저하게 속물근성을 보인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편마다 중간에 신영의 일기 같은 내레이션을 삽입해 자칫 시트콤처럼 흐르기 쉬운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거기에는 한국에서 나이 많은 여성이 홀로 살아가면서 겪는 인생의 팍팍함, 쓸쓸함 같은 것이 잘 드러난다. 승리의 자살을 말리며 세 친구가 목놓아 우는 장면 뒤에 흐르는 내레이션 같은 게 특히 그렇다.

“서른 살 넘게 살다 보니 삶의 지혜도 얻게 됩니다. 인생엔 견뎌야 할 때가 있다는 것. 눈보라 친다고 해서 웅크리고 서 있으면 얼어죽는다는 것. 눈 비 바람 맞으면서도 걷고 또 걸어가야 한다는 것. 처절한 고통의 현장에서 눈물콧물 흘리는 이신영이었습니다.”

한국판 〈섹스&시티〉 같다는 얘기도 있다

뉴욕여성 4명의 일과 사랑, 섹스이야기를 절묘하게 그려내 높은 인기를 누리는 미국 시트콤 〈섹스&시티〉. 칼럼니스트 캐리가 헤어진 옛 남자친구를 다시 만나 어떻게든 꼬셔서 ‘섹스’를 하려고 안달하는 장면은 신영이 준호에게 공을 들이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한 남자의 사랑을 원하는 순정파 샬럿은 진순애, 장승리는 자유분방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사만다의 설정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 인터넷 게시판에도 “섹스&시티와 설정이 비슷한 것 같다”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섹스&시티〉가 섹스를,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결혼을 주요 모티브로 한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하지만 두 나라 여성이 처한 현실 때문이겠지만 〈섹스&시티〉의 여성들이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여성들보다 훨씬 진취적이고 도전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경우 신영과 같은 전문직 여성이 앞뒤 안가리고 결혼에 목을 매는 설정은 바로 드라마의 현실성을 약화시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가 기존 드라마의 가치체계를 뒤엎으려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역시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보수적 설정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김도형 기자 aip20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