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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버린 시간, 선율은 흐르고
2001-06-07

<썸머타임> 음악 엄인호

1952년 서울 출생·79년 이정선과 풍선 트리오로 데뷔·83년 그룹 ‘장끼’ 활동·86년 신촌블루스 결성·91년 <가을여행>으로 영화음악 시작·2001년 <썸머타임> 음악감독

결국, 80년 광주와 식스티 나인과의 관련성을 찾는 데 실패했다. 결렬될 게 뻔한 협상 테이블을 지켜보는 답답함이 이런 것일까. 영화 <썸머타임>은 화해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들을 이름 모를 소도시의 뜨거운 태양빛 아래 질펀하게 늘어놓은 채, 그저 무심하게 엔딩을 향해 흘러간다. 연극무대를 옮겨다 놓은 듯한 세트와 배우들의 연기는,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시대감각을 교란시키며, 감정이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정사신은 빡빡한 메마름마저 안겨준다. 이쯤 되면, 간간히 귀를 적셔주는 단비 같은 음악이 고맙다. 매운 고추를 마요네즈에 찍어 먹은 것마냥 불편한 속으로 지루한 정사신을 감상하고 있을 때다. 한창 몸이 단 두 남녀가 하나로 합쳐지는 장면에선 교성 대신 섹시한 듀엣곡이 흐른다. 가사에 귀기울일 여유가 있었다면, 그것이 희란(김지현)과 상호(류수영)의 슬픈 이별을 그대로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정이 있는 두 남녀가 서로 사랑했지만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흡사 영화 스토리에 일부러 맞춘 듯한 노래말은, 그러나 음악가 엄인호(50)의 실제 사연(?)을 담아 만든 그의 솔로앨범 수록곡 <내 마음 속에 내리는 비는>이다. 물론 영화를 위해 새롭게 세팅했다. 원곡의 드라마틱한 웅장함 대신 통기타 반주로만 깔끔하고 고적한 분위기를 살린 것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시대는 ‘5월 광주’의 80년대, 따라서 음악의 주된 느낌은 ‘멈춰버린 시간’이라고 엄인호는 설명한다. “광주는 아직까지 80년에 머물러 있어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죠.” 반복되는 피아노와 기타 선율은 듣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레 과거를 회상하고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그게 엄인호의 의도다. 영화음악을 작곡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도, 그래서 전자음의 배제다. 80년 어느 길모퉁이나 라디오에서 흘려 들었을 법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일렉트릭 기타와 신시사이저의 사용을 일체 배제하고 수수한 통기타와 피아노에 하모니카를 곁들였다. 좀더 강한 음을 내야 할 때는 이펙터를 걸지 않은 슬라이드 기타(일렉트릭 기타지만 어쿠스틱한 음을 냄)를 썼다. 사실 영화음악을 듣다보면 그가 예전에 <신촌블루스> 멤버였다는 사실을 모르고도, 블루스적인 요소가 음악 전반에 깔려 있음을 쉽게 눈치채게 된다.

박재호 감독의 제안은 사실 급작스러웠다. 본촬영을 마치고 보충촬영에 들어갈 때쯤 그에게 떨어진 음악작업은, 아들의 유학문제로 미국에 다녀와야 하는 때와 맞물렸다. 일단 편집된 테이프를 들고 비행기에 오른 그는 열흘 만에 예고편의 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귀국해야 했고,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적나라하고 과감한 정사신 앞에서 서둘러 선곡 결정을 철회하기도 했다고. 저작권문제에 걸려 주제곡으로 예정돼 있던 조지 거슈윈의 과 샘 쿡의 를 쓰지 못하게 되어 비슷한 분위기의 창작곡으로 대체하느라 진땀 흘린 속내를 털어놓는 그지만 영화만큼은 잘됐으면 한다. 얼마 전 젊은 뮤지션들과 공연을 가진 그는 앞으로 전후 세대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미래성을 가진 음악으로 다시 활동을 재개할 예정이다.

글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사진 이혜정 기자 hy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