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앤 캐서린 에머리히 지음| 공보경 옮김 | 집사재 펴냄)는 19세기 초 독일 수녀 앤 캐서린 에머리히가 보았던 환상을 기록한 책이다. 어린 시절부터 고행을 자처했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 에머리히는 스물아홉살에 수녀가 되었고, 몇년 뒤부터 손과 발에 성흔이, 가슴 위에는 붉은 십자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흔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와 같은 위치에 피흘리는 낙인처럼 새겨지는 상처. 그 때문에 성인 직전의 반열에까지 오른 에머리히는 고통 속에 본 환영을 당대의 작가 클레멘스 브렌티노에게 구술했고, 놀라운 기억력과 소박한 심성으로 태어난 <성모 마리아의 삶> <그리스도의 삶> 그리고 이 책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이 새삼스럽게 관심을 받게 된 까닭은 멜 깁슨이 우연히 예전에 읽은 이 책을 다시 발견하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멜 깁슨은 이 책을 경유하여 성서에 충실하기로 했다고 밝혔지만, 수천년 전 잔혹한 고문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묘사는 에머리히가 체험한 것과 비슷하다. 에머리히는, 그녀보다 앞선 혹은 그 뒤에 따라온 성인들이 그러했듯, 예수와 마리아와 군중의 심리 속에 일인칭으로 들어갔다가도 그 마음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감당하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수치를 뜻하는 진홍색 망토를 두르고 예수가 당한 고통, 군인들이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커다란 살점이 떨어져나가 피로 얼룩진 예수의 육체, 나도 함께 죽고 싶다고 애원하던 성모 마리아의, 인간일 수밖에 없는 모정. 에머리히는 예수의 수난을 자기 것처럼 느껴야 한다고 가르침받았던 19세기 신자들에게 아마도 천국의 문앞에까지 이른 성녀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이들이라면 단조롭고 꾸밈없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지루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최후의 만찬 무렵부터 예수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단 며칠 동안을 60개가 넘는 장으로 나눈 이 책은 그 세밀한 순간에 공감할 수 있어야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남긴, 피가 고인 발자국에 몸을 던지는 마리아는 분명 애처롭지만, 이 책은 서사보다는 단순한 재현에 가깝다. 그리스도가 내 죄를 대신해 죽었다고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 재현은 지나치게 길고 자세하다. 게다가 에머리히는 타락한 당대 교회 현실과 신자들을 향한 분노와 예수를 향한 애정도 다소 장황하게 집어넣어 황홀경에 내뱉은 고백 특유의 리듬을 떨어뜨리곤 한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멜 깁슨의 영화처럼 책으로서보다는 신앙의 기록으로서 더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 기록은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잔인한 묘사, 때묻지 않은 수녀의 경악과 슬픔과 사랑, 환상과 현실을 당연한 것처럼 오가는 서술방식, 그곳에 근원을 대고 있는 야심만만한 영화가 겹쳐 있어 흥미롭다. 불경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의 수난은 언제나 스펙터클하고 흥미로운 사건임에 틀림없다.김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