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어떻게? 영화는 <투스카니의 태양>이 그녀에게 필요했던 처방의 모든 것이라는 식의 순진함을 보이진 않는다. 처방의 요점은 유쾌하고 낭만적인 일련의 일탈. 낙천적인 게이들 사이에 파묻혀 일종의 묻지마 관광을 떠난 것도 그렇지만 있는 돈 탈탈 털어 다 쓰러져가는 투스카니의 전원주택을 구입해 아예 눌러앉는 것은 이 ‘묻지마 행보’의 백미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유가 아주 없지는 않다. 해바라기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니는 여인에게 ‘태양을 고대한다’는 뜻의 ‘브라마솔레’라는 이름의 저택이란, 삶에 다시 한번 햇살이 비추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와 같기 때문이다. 그녀의 바람도 결국 이 폐허가 된 집에서 “결혼식이 열리고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지 않던가. 그녀의 창조성을 은유하는 메마른 수도꼭지가 있고, 비바람마저 막을 길 없는 이 저택의 폐허가 그녀 자신의 은유이고 보면, 영화가 집을 수리하는 과정과 그녀의 회복을 꼼꼼히 등치시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로저 에버트가 이 과정을 ‘성공적인 도피주의(escapism)’로 평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따라붙는 것은 과연 성공적인 도피주의가 정말 가능한가에 관한 질문. 이 행복한 이야기에 대해 너그러움과 냉소, 호평과 혹평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것도 여기서부터다. 가장 큰 혐의는 물론 이 영화가 여지없는 할리우드표 거짓 복음이라는 건데, 동명의 원작인 <Under the Tuscan Sun>이 사실 이탈리아에 있는 집을 남편과 함께 개수하며 느낀 점을 적어 내려간 일종의 수상록이었다는 것과 절망적인 이혼녀 설정 따위는 있지도 않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자면 영화가 다만 ‘집의 개축=자아의 재건’이라는 컨셉과 장소만 가져왔다는 느낌도 물론 피하기 어렵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묻지마 행보 속 프란시스에게는 계속 무엇인가가 일어나거나 찾아온다. 플롯의 결락(缺落)을 말끔히 땜질하는 데 유용한 천둥번개를 시작으로, 뱀이 나타나고, 남자가 나타나며 애를 밴 친구 패티가 찾아온다. 그게 아니라면 주인공은 또다시 도피를 하여 새로운 실마리(또는 기적)를 물어온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비둘기 똥이 머리에 떨어지는 이적과 함께 시작된 이 행복한 상상은 어처구니없는 낙관이라기보다 ‘증거’(Sign)를 표지 삼아 구원을 향해 헤매는 종교적 순례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계시의 말씀을 들려주는 신(神)을 페데리코 펠리니가, ‘오라클’ 대신 ‘모자 쓴 여인’이 코믹하게 대신하기는 하지만. 거기다 시종 석양의 색채로 물든 파스텔 톤의 거리, 흙과 돌로 만든 길과 담이 정겨운 투스카니의 정경은 거의 약속의 땅만 같다. 영화는 이렇게 발랄한 흐름으로 관객에게 재생의 복음을 포교하는 중이다. 성실하게 집을 개축하며 믿음의 행위를 하는 주인공과 거듭되는 응답의 기적이 있으니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문제는 로맨틱한 천년왕국으로 가는 이 여정이 영화의 클리셰를 구해내기엔 너무 순조롭기만 하다는 점이다.
차라리 그 역할을 해내는 것은 <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로 필력을 인정받은 오드리 웰스가 기꺼이 자신의 문체를 집어넣어 버무린 작가적 육성이다. 실제로 30대 여성의 흔들리는 심리를 진솔하게 토로하는 프란시스의 감수성은 침대에 홀로 앉아 켜보는 ‘파워북’을 통해 <섹스&시티>의 캐리의 그것과 살짝 겹친다. 여기다 좌충우돌하는 액션으로 슬럼프에 빠진 한 작가의 감성 변화를 너끈히 받아넘긴 다이앤 레인의 호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드러나고 무엇이 감춰졌으며 영화가 어떤 잔재주를 썼는지가 아니다. 그보다는 화면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 관객 스스로 이 뻔한 기적들을 믿도록 작동시키는가 일 텐데, 영화는 이에 대해 편협하고 성급한 답안을 제출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 자아의 은유인 ‘브라마솔레’가 재생의 대가로 그녀의 로맨스가 아닌 다른 이들의 삶을 축복할 때에야, 클리셰는 비로소 생태적 욕망으로 승화될 여지를 보이고 영화는 원작의 중의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순간, 숱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투스카니의 태양>은 장르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작은 진심으로 빛난다.
:: 비하인드 스토리
<투스카니의 태양>이 빛나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