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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누님 그리고 싸모님, <바람의 전설>의 이칸희

더이상 배울 것도, 가르쳐줄 스승도 없어 5년 만에 ‘하산’한 박풍식(이성재)이 춤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길 없어 카바레를 찾는다. 그런데 풍식이 누군가. 그는 제비를 경멸하는 ‘예술가’다. 그 격에 맞는 파트너를 찾기 위해 신중을 기하다가 눈에 번쩍 띄는 우아한 사모님이 있었으니 경순(이칸희)이다. 기품이 뚝뚝 흘러넘치는 그들의 왈츠 자세에 카바레 필부필녀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스크린 밖에서 지켜보는 이에게도 이들의 만남이 어쩐지 설렌다. 그런데 정치하는 남편의 뒤통수만 봐도 울화통이 터지는 여인이 제 짝을 만난 건 춤만이 아니다. 지적인 눈빛과 어울리는 도도한 입술에서 의외의 말이 터져나온다. “오늘은 그냥 못 가. 나 배고파. 나 좀 채워줘.”

갑자기 묘한 긴장감과 함께 웃지 않을 수 없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달리는 차 안에서 해방감에 취한 그녀가 70년대풍 한국영화의 한 장면을 재현한다. “끼아아악! 미스터 박, 더 빨리 달려줄 수 있어? 끼아아악!” 급기야 술에 취해 흐트러진 자신을 침대에 온전히 재우고 불침번만 서버린 풍식에게 원망의 베개를 집어던진다. 이런 장면들은 웬만해선 유치찬란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평소에 “어쩜 화장실 갈 때도 심각하니”라는 말을 들을 만큼 조신한 이칸희의 고운 자태를 만나 기막힌 유머가 됐다. 그녀는 풍식을 제목 <바람의 전설>에 어울릴 만한 제비들의 전설로 만들어주는 당사자인데 그녀가 나오는 시퀀스는 영화 속 영화 같다. “자신을 발견해준” 박정우 감독이 “아∼ 진짜 <미워도 다시 한번>이다”라고 감탄을 연발한 그대로 이들 장면을 그 고전적 영화 스타일로 찍었고, 그 속에서 이칸희의 기품과 어그러지는 대사가 의외의 화음을 발산한다.

<공공의 적>에서 ‘공공의 적’ 이성재의 아내로 나왔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 송강호의 아내로 죽은 딸의 화장터에서 펑펑 울었지만 배우 이칸희를 기억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그런데 그는 어딘가 낯이 익다. 아기용품 CF에 나오곤 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하, 그렇군’ 하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인상이다. <바람의 전설>에서 그는 진지할수록 웃음을 선사하는 캐릭터다. 실제로 아주 차분하고 진지해서 “그렇게 진지하게 찍은 장면들을 보고 시사회에서 그렇게 웃어댈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의외의 반응에 놀랐다. 하지만 그 표정이 밝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등의 연극과 몇편의 드라마를 거쳐 어느덧 30대 중반에 이른 ‘여배우’로서 “역할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꾸준히 버틴 게 나의 힘이에요. <황산벌> 속 대사처럼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고 할까. 30대 여배우가 할 수 있는 공간이 아주 좁지만, 나이가 들수록 빛을 보는 연극계 출신 남자배우들이 좋은 모범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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