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훈 감독은 임상수 감독의 <눈물> 연출부 때 전국의 유흥가를 돌며 ‘10대 문제아’ 700명을 만났다. 임 감독의 주의사항은 딱 하나였다. ‘잘 기회가 생겨도 절대로 자지마!’ 여중생과 술마시며 이야기하는 길고 긴 취재를 통해 많은 걸 배웠다. “그들 자신은 잘살려고 하는데 어떤 게 잘사는 건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걸 배웠다. “영화는 (현실의 인간들을) 만나면서 찍어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사기꾼들을 직접 만나고 취재하는 과정을 거쳐 <범죄의 재구성> 시나리오를 썼고, 감독으로 데뷔했다. 실제와 접선하며 만들었지만 결과는 깔끔한 장르영화. 앞으로도 이 범상치 않은 신인감독의 주 무대는 장르영화가 될 것이다. 물론 “장르를 이용하는 것”이다. <범죄의 재구성>을 보면 아쉬움 때문이 아니라 어떤 기대감 때문에 벌써 그의 차기작이 기다려진다. 아닌 게 아니라 “두 번째 작품에선 배우의 감정만 잘 잡으면 좀더 자신감 있게 내 맘대로 찍을 것 같다”고 한다. ‘장르적 자의식’으로 가득 찬 최동훈 감독은 영화아카데미 15기였고 보습학원 국어강사이기도 했다.
임상수 감독이 이 영화를 보고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맨땅에 헤딩하는 영화인데, 심하게 헤딩하니까 땅이 파이네”라고.
한국의 장르영화라는 건 기획영화라는 말만큼 아직 보편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데뷔감독이 능수능란하게 장르영화를 주조해낸 비결이랄까, 영화에서 보이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누군가의 말처럼 나 역시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거다. 장르영화라고 하지만 등장인물이 다 땅에 붙어야, 다 현실적이어야 한다. 한국에서의 장르영화는 그래야 한다. <살인의 추억>도 스릴러라는 장르를 유지하면서도 인물들의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범죄의 재구성>은 잠시 스릴러인 척하지만 결국은 미스터리다. 이런 하위 장르에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고, 공부도 많이 했다. 물론 공부 많이 한다고 잘 만드는 건 아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잘 쓰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영화를 보면서 신을 다 적는다. 1신부터 100신까지 주욱 적어놓고 이렇게 저렇게 살펴본다. ‘어, 이거 재밌는데. 이 신의 정체는 뭐지?’ 하면서.
주로 장르영화를 놓고.
예전에 <자전거 도둑>을 놓고 해봤는데 별로 재미가 없더라. 드라마가 약간 관습적인 게 도움이 된다. 혼자 사는 이후로 공포영화는 절대로 안 보고 있고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주 대상으로 삼았다. 미스터리에 강한 애착이 있다. 작가주의는 대학의 영화서클 때 관심이 많았는데 시간이 가면서 점점 옛날의 장르영화로 자리이동하게 되더라. 영화아카데미 다닐 때 단편 네개를 찍었는데, 장르도 분위기도 다 다르게 만들었다.
백수 시절, 전세보증금을 ‘사기’당한 감독 개인의 사연에서 이 모든 이야기가 출발했다고 봐도 되는지.
(웃음) 이제 그 이야기는 전 국민이 다 알아(<씨네21> 446호에 실린 감독의 ‘사기사건 취재수첩’에 그 사연이 소상히 담겨 있다). 그때부터 관심을 가진 건 사실이지만 당시엔 별 생각 없다가 데뷔 준비하다보니 ‘이 이야기면 되겠다, 내가 피해자이기도 하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냈어, 하는 안도의 순간에 뒤통수 맞고, 수술(사기)하려다 수술당하는 꾼들의 세계를 통해 인생의 아이러니를 발굴·재구성하는 건 언제봐도 흥미롭다. 이런 면에서 영화를 보다보니 허영만의 <타짜>가 떠올랐다. 오리지널리티를 따지려는 건 아니다.
삶의 질곡들이 있어야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평범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우여곡절 끝에 처음의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었다’라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부딪치는 이야기로 만들려 했다. <타짜>는 영화로 만들 수 없다. 카드나 화투를 설명할 경제적 시간이 영화에는 없다. 그런데 취재를 꽤 했지만 취재가 그대로 영화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이 구성을 이야기해주는 것도, 사건을 이야기해주는 것도 아니다. 단지 시나리오 쓸 때 굉장히 편하다는 것뿐이다. 특히 캐릭터를 잡아갈 때. 결국은 이야기가 제일 중요했다. 어떻게 인물을 등장시키고 배치해서 갈등을 겪게 하는가 하는. 심포니록, 아트록을 좋아하는데, 이런 구성은 똑같은 걸 변주하는 게 아니라 제각기 다른 독립된 것으로 음악을 만들어간다. 이 영화를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보통의 가요, 팝은 랄라라 하다가 후렴구 나오고 랄라라 하다가 후렴구 나오고 끝난다. 기승전결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재밌게 끝까지 끌고 가려고 했는데 막상 쓰려니까 굉장히 어렵더라.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렸다.
‘사기의 미학’이란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미학은 모든 것에 있지 않나. 삶의 아주 후진 부분에도. 이 영화의 사기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보통의 사기다. 사기에 대한 보고서라고 할까. <오션스 일레븐>처럼 과장되고 판타지적인 걸 보여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장르적이지만 여기에 리얼리티가 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난답니다, 여러분’ 하고 발언하는 거다.
제작자인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가 주요 취재원들을 자기 주변에서 소개해줬다.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라 심리전이다.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그 사람이 뭘 두려워하는지 알면 게임 끝이다”, 라는 게 감독의 결론이라면 차 대표의 생각은 무엇이었나? 대체로 자기의 친구들인데.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재밌게 해라”라는 말만 했다. 8번째 버전이 나왔을 때, 된 것 같다며 프로듀서를 붙여주고 차 대표는 완전히 손을 뗐다. 그뒤에 프로듀서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6번을 더 고쳤지만.
오랜 취재 끝에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면서 감독 자신의 삶의 노하우도 풍부해졌을 것 같다.
사람이 변했다. (웃음) 촬영하면서 친구들이 ‘야, 너 진짜 사기꾼 같아진다’고 하더라. 세상이 뭔지 진짜 모르고 살다가 ‘아… 이런 면이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됐다. 성장의 과정이랄까. 약간 유들유들해지고. 감독이 돼서 그런 것도 있을 테지만.
구로동 샤론 스톤(염정아)이란 캐릭터가 의외로 모호하다. 팜므파탈 같은 데 실은 그렇지 않고 똑똑해 보이지만 사실 똑똑하지 않다. 오히려 기회주의적이고, 남자에 대한 순정을 판타지로 갖고 있는 가장 덜 사기꾼적 인물이다. 하필 유일한 여성 캐릭터를 가장 프로답지 않게 그린 까닭은.
그게 분석의 맹점인데, ‘어? 이 여자 팜므파탈이어야 하는데 왜 아니지’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팜므파탈이란 건 유형일 뿐이어서 캐릭터를 그렇게 맞출 수는 없었다. 이 여자가 가진 통찰력은 영화에 보여지는 그대로 있다가 없다가 그런 거다. 많은 사람들이 이 캐릭터를 헷갈려 하는 건 이 여자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염정아씨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다른 캐릭터는 특징적인 두 가지 모습만 가진다. 평상시 때의 건달과 사기 칠 때의 모습.
하필 이 여자에게 그런 걸 요구한 건.
이 여자는 한국은행 터는 데 끼지 않고 전혀 다른 일을 하는 캐릭터다. 사기꾼과 같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한번도 같이 있지 않는다. 독립된 존재다. 전반부는 이 여자의 욕망으로 흘러가는 것 같고 후반부에는 이 여자가 인물들 사이의 키를 가진다.
최창혁(박신양)을 빼놓고 다른 캐릭터들에게서는 속고 속이는 이중 플레이의 긴장감이 떨어진다. 특히 김 선생(백윤식)이 이렇게 심하게 당할 수 있나.
김 선생은 원래 삼류다. 일류인 척하고 사는 건데, 이 영화가 김 선생의 스토리라고 치면 김 선생의 몰락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김 선생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해서 영화가 더 재밌어지진 않을 거다. 그가 몰락하는 이유는 자기 자존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완력을 쓰려다가 그렇게 되는 거다. 그의 몰락에 개인적으로는 어떤 애도도 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감독의 시선에는 아무리 파렴치해도 사기꾼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루저(낙오자)에게는 일단 다 애정을 가져야 한다. (웃음) 나에게 사회학적으로 남은 마지막 애정이 루저에 대한 것이다. 영화에서 형사도 루저고, 최후의 승자처럼 보이는 인물도 결국 루저다.
“죄한테 무슨 죄가 있어, 죄 지은 인간이 나쁘다”고 했던 <넘버.3>의 대사가 떠오른다.
언어도단인데. (웃음) 이들이 악인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그 세계의 삶의 방식이 있는 거고. 사기 당하는 대상도 고려했다. 약간은 탐욕스러운 사람이거나 한국은행 같은 무생물의 기관이 피해자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사기치고 당한다.
피해자라고 하지만 과도한 욕망에 대한 응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나.
세상이 영화처럼 돌아가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이런 것도 있다. 보석상 사장의 경우는 ‘고대’라고 대학이 같다고 덜컥 믿었다가 사기를 당하는데, 한국사회의 학연주의에 대한 조롱이랄까 뭐 그런….
영화의 모티브가 된 1996년 한국은행 구미지점에서 일어난 당좌수표 위조사건은 결국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 당시 사건에 대한 기록을 검토했을 텐데 뭔가 특이점이 있다면.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건 어떻게 한국은행을 털었을까 하는 거다. 보통 은행에 가서 사기치는 경우는 있는데 시스템이 가장 완벽할 거라고 여겨지는 한국은행에 가서 사기칠 생각을 했다니.
배우들 가운데 어떤 발견을 했다고 느껴지는 이가 있나.염정아씨. 일취월장했다고 할까, <장화 홍련> 때부터 그런 조짐이 보였는데 전작들에 비해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다.
배우들에게 “이건 장르영화다”라고 말해주면 연기하는 데 더 편할까.
그렇지 않다. ‘존 웨인처럼 해주세요’라고 하면 ‘그러면 존 웨인 쓰지 왜 날 써’ 하는 반응이 온다. 모여서 웃고 떠드는 이야기라고만 말했다. 배우는 가둬두면 안 되지 않나?
식상한 질문이지만 최근에 재밌게 본 영화는.
<트래픽>과 <에린 브로코비치>. 그리고 <옹박>. 이중에서 <트래픽>을 꼽고 싶은데 재미없는 이야기를 그 긴 시간 동안 무지막지하게 끌고 가는 힘이 놀랍다. 영화라는 게 감독 맘대로 찍는 거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해줬다.
차기작을 벌써 정한 것 같던데.
이장호 감독님이 80년대에 만들었던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를 리메이크하려고 한다. 칼빈총 은행강도를 했던 이종대, 문도석의 이야기다. 은행을 터는 게 아니라 은행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협박해서 돈을 뺏는데 나중에 일가족을 다 죽이고 자살한다. 굉장히 슬픈 이야기다. 세고.
어떤 장르에다 어떤 코드를 담으려고 하는가.
아직 모르겠다. 굳이 말한다면 <보니와 클라이드>와 서부도망극의 변형? 왠지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철학의 근본 문제는 가족문제라고 생각한다. 스탈린의 아버지가 스탈린을 그렇게 때리지 않았다면 스탈린이 과연 500만명을 죽였겠는가. 어쨌든 표피는 서부극을 덧씌울지 모르겠지만, 이들이 왜 가족 몰살이라는 극한 상황으로 가는가를 보려고 한다.
모든 죄의 근원을 가족으로 가져가려는 건 아닐 텐데.
죄의 일부분이 가족에 있는 거지. 결국은 사회의 문제인데 그걸 가족이 감싸안아주면 치유가 될 수도 있다. 정신적 상처가 일정한 선을 넘어 폭발해버리는 사람의 이야기다.
인터뷰를 준비할 때도 그랬고 인터뷰가 끝나는 이 순간도, 뭔가 미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이 영화가 몇신이나 될 것 같나? 200신이 넘는다. 이야기가 굉장히 많다. 보통 영화의 두배는 되는 것 같다. 스토리 블록버스터다. 아님 주둥이 액션영화랄까. 내가 할리우드에 있으면 <진주만> 같은 걸 찍고 있을 거다. 여기에 있으니까 한국영화 안에서 좀 다른 걸 해보고 싶었다. 추적신도 다르게 찍고 싶었고. 일종의 오기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어쩔 수 없이 앉아서 말할 때 빼고. 한국영화를 보면서 싫어했던 걸 피해가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 영화가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굉장히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