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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환>의 김동원 감독을 부러워 하는 어느 역사학자로부터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고은, <만인보>(萬人譜) 서시

김동원 감독은 사람들이 <송환>을 “30년 넘게 감옥에 있었던 특별한 사람들을 12년간 따라다니며 찍은 특별한 다큐멘터리로 보지 말았으면 한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나는 그의 말에 절반은 동의하지만, 절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송환>을 본 사람들은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사람을 30, 40년씩 가둬놓는 한국 현대사가 특별한 것이지, 풀어주지 않아서 오랜 징역 살아야 했던 분들이 원래 특별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나는 <송환>은 정말 특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송환>을 본 사람은, 특히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한국 현대사를 살짝 다룬 영화를 같이 본 사람은 <송환>이 왜 특별한 영화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오랜 세월이 빚어낸 따뜻한 풍경

나는 1999년 늦봄부터 2000년 8월까지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한 경험이 있다. 언제 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기에 기록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선생님 몇분이 주동이 되어 시작된 작업이었다. 꿈같은 송환이 갑자기 이루어지게 되어 작업이 중단되었지만,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을 모시고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스무분 내외의 선생님으로부터 한분당 대개 이틀에 걸쳐 열댓 시간씩 출생에서 석방까지의 세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 나는 현대사 연구자 중에서 누구보다도 장기수 선생님 문제에 가까이 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처지에서 영화를 보며 다시 한번 절실하게 느낀 것은 내공의 차이였다. 12년간 한우물을 파 이웃들에게 시원한 물을 나눠주는 사람을 보며 한 1년 남짓 비슷한 곳에서 삽질해대던 사람이 느끼는 존경과 부러움과 시샘을 더하여서….

김동원 감독을 처음 본 것도 선생님들 모임이나 행사가 있으면 부지런히 쫓아다니던 그 무렵이었다. 내 기억에 어딜 가나 그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작 그가 카메라를 들고 선생님들을 찍고 있는 모습은 별로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그냥 그렇게 선생님들 사이 어딘가에 편하게 퍼질러 앉아 있는 그의 모습, 그 자연스러운 모습은 지금 와 생각해보면 오랜 세월이 빚어낸 하나의 풍경이었다. 어떤 인터뷰에선가 김 감독이 장기수 선생님들이 30, 40년 징역을 살았다 해도 살인적인 전향공작을 30, 40년 내내 받지는 않은 것처럼 자기도 12년 내내 <송환>만 찍은 것은 아니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비전향 장기수라는 딱딱하고 살벌하기까지 한 주제를 다룬 <송환>이 그리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관객을 끌고 갈 수 있는 힘도 12년간 곰삭힌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148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 화려한 액션도, 스타도, 특수효과도 없지만 시간은 후딱 가버린다. 그동안 관객은 웃음과 눈물, 기쁨과 슬픔, 사랑과 분노, 만남과 헤어짐, 회한과 부러움, 즐거움과 안타까움, 엉뚱함과 섬뜩함, “아, 맞어, 그랬어” 하며 되살아나는 기억에 대한 반가움과 희미해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잔함 등등 우리가 살아가며 맛볼 수 있는 온갖 감정의 기복을 진하게 경험하게 된다. <송환>을 보는 동안 카메라라는 기계도 참 따뜻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내내 했다. 12년 동안 품어온 세월 덕에 카메라란 놈도 체온을 갖게 된 것 같았다.

영화의 화자이기도 한 김 감독은 반공주의자였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이 영화를 보셨다면 틀림없이 화를 내셨을 것이고, 장기수 선생님들도 썩 만족스러워 하시진 않았을 것이란 말로 영화를 시작한다. 이런 대목, 저런 장면, 틀림없이 불만을 가지셨을 거다. 그러나 선생님들이 <송환>에 대해 불만을 가지셨을까? 영화의 끝부분에 가면 북에 계신 조창손 선생이 “말은 안 했지만 김동원 감독은 나에게 아들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1년쯤 장기수 선생님들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본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런 느낌은 조창손 선생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선생님들을 비추는 김 감독의 카메라만 따뜻한 것이 아니었다. 김 감독을 바라보는 선생님들의 시선은 더 따뜻하고 더 짠했다.

김 감독과 인사를 나누기 전에 내가 김 감독을 가리키며 “저분은 누구세요?” 하고 묻자 주변의 선생님들은 그를 보면서 “찍기는 아주 열심히 찍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리셨다. 선생님들은 오랜 징역생활 덕에 똑 부러지고 깐깐한 태도가 몸에 배어 좀처럼 말끝을 흐리는 법이 없는데, 유독 김 감독 얘기를 할 때는 말끝이 흐려졌던 것 같다. 둔한 나는 처음에는 찍기만 엄청 찍고 송환운동에 도움이 되는 영상물은 만들어내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자식이 뭔가를 열심히 하긴 하는데 가시적인 성과는 보이지 않고, 그런데 주변에서 “걔는 요새 뭐한데요?” 하고 ‘관심’을 보이면 우리 부모님들은 무어라 답하실까? <송환>이 마침내! 드디어! 기어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선생님들은 무척 기뻐하실 것이다. 선생님들이 불만을 가질 만한 부분- 어떤 부분인지는 김 감독 자신이 제일 잘 알 것이다- 이 제법 많다는 것은 그 다음 문제이다. 어떤 할아버지가 늦둥이 손자가 태어났는데, 코가 좀 못생겼다고 내다 버리라고 할까?

은밀하게 전향당한 우리들

내가 <송환>을 본 것은 3월11일 밤이었다. 탄핵안이 발의되어 있었지만, 여느 시민들처럼 ‘설마’ 하고 있으면서 영화보고 늦게까지 술마시며 영화의 감동을 즐겼다. 다음날 원고를 써서 <씨네21>에 넘기도록 되어 있었지만, 막상 탄핵안 가결 소식을 듣고 보니 <송환>을 갖고 글을 쓰는 게 좀 한가롭다는 생각도 들고 치떨리는 마음에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어 탄핵에 대한 글을 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송환>이야말로 이 탄핵정국에 꼭 보아야 할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탄핵안에 찬성한 의원들 중에 한때 꽤 괜찮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어쩌다 저 지경에 이르렀을까?

어찌 그들뿐이랴? 영화 속에서 “600대까지는 세었어”라는 진태윤 선장의 독백이 소름이 돋도록 전해주듯이 전향공작의 폭력성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그 폭력 앞에 무릎이 꺾인 것이라면, 그래도 언제 어디서 그랬는지는 알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이미 은밀하게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의 일상 속으로 파고든 전향공작에 모두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닐까? 젊은 날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탄핵에 앞장선 민주당의 한 의원이 시인이었고, 그의 시집 제목이 <지난날의 꿈이 나를 밀어간다>라는 사실에 아픈 마음이 다시 한번 아려온다. <박하사탕>에서처럼 그렇게 처절하게 망가지고 난 다음에야 달려오는 기차 앞에 서서 “나 돌아갈래!”를 외쳐야 하는 것일까?

<박하사탕>의 김영호는 그래도 자기가 돌아가야 할 곳을 알고 있었다. 김영식 선생처럼 강제전향을 당하고 그 취소를 요구하는 분이나, 김남주 시인처럼 “이 환장할 청춘”에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라고 이를 북북 갈며 “나의 피, 나의 칼, 나의 노래”를 지켜낸 사람들, 그들은 상처받은 몸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죽기 전에 걸어야 할 길”을 잃지 않은 분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향자들은 그렇지 않다. 상처를 안고 긴 침묵 속으로 빠져들거나, 비전향자들이 상처를 보듬어주지 않는다고 처음의 미안함을 미움으로 바꾸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20대 때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가슴이 없는 자이고, 40대에 아직도 사회주의자이면 머리가 없는 자이다”란 교활한 말로 우아를 떨며 자기들의 전향을 합리화한다. 돌아서서 침뱉고, 자신이 한때 정열을 바쳤던 곳에 불을 싸질러버리는 자도 부지기수다. 전향공작은 살벌한 이야기지만, 그것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따뜻하고 울림이 있다. 저들이 꺾으려고 한 것이 꿈만이 아니라 꿈을 꿀 수 있는 마음이었다. 빼앗긴 꿈이야 다시 꾸면 그만이지만, 꿈꿀 수 있는 마음마저 빼앗긴다면 영영 꿈을 꿀 수 없다. 전향서가 “그까짓 종이 한장”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100살이 다 되어 종잇장처럼 가벼워진 어머니가 45년 만에 석방된 일흔이 넘은 아들을 처음 만나 “네가 어른 말 안 들어서 그래”라고 가볍게 꾸짖는 대목보다 더 극적이고, 더 한국적이고, 이보다 더 현대사의 상처를 보여주는 장면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옛날이야기라면 두 모자가 이렇게 만나 행복하게 잘먹고 잘살았다고 끝나야 마땅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다른 가족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김선명 선생께 연락을 주지 않았고, 묘소마저 가르쳐주지 않아 김선명 선생은 그저 선산 부근만 헤매다가 어머니 산소에 술 한잔 올리지 못하고 송환길에 올라야 했다.

<송환>은 주체적으로 전향을 거부한 ‘비전향’과 아직 전향하지 않았다는- 그러므로 여전히 전향공작 대상인- ‘미전향’의 차이를 아주 열심히 보여주지만, 일부 매체는 아직도 미전향이란 말을 고집한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어느 기자는 <송환>을 소개하면서 ‘미전향’ 장기수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라고 버젓이 써놓았다. 게으름이 빚은 실수였을까, 아니면 확신범의 소행이었을까? <메멘토> 같은 작품의 시놉시스가 나오기 수십년 전에, 전향공작에 맞서 자기 몸에 유리조각으로 유서를 써야 했던 서준식 선생이 살아나와 인권운동을 벌인 지 10년이 넘었어도, 전향제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부가 공언한 지 여러 해가 지났어도, 송두율 교수는 여전히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방 이후 최대의 간첩으로 몰려 있다.

그 옛날 <파업전야>를 만들었고 뒤에 명필름의 제작자가 된 이은 감독은 영화인으로서 자기가 콤플렉스를 느끼는 사람이 딱 둘이 있는데, 국외에서는 켄 로치이고, 국내에서는 김동원이라고 했다. 현대사를 대중에게 쉽게 전하기 위한 글쓰기를 모색해온 나 역시 <송환>을 보며 참 부러웠다. <말죽거리 잔혹사>와는 비교가 안 되게 잔혹했던 이야기를 어떤 코미디보다도 더 재미있고, 어떤 드라마보다도 더 사람냄새 나고, 어떤 스펙터클보다도 더 보는 사람을 확 빨아들이도록 만든 그 솜씨가 정말 부러웠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마냥 조창손 할아버지뿐 아니라 다른 할아버지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계속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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