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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예고편 완전정복 [3] - 국내 예고편 베스트
박혜명 김수경 2004-03-26

최고라 칭하기에 아깝지 않다

지금까지 나온 국내영화 예고편을 통틀어서 최고를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이 리스트는 예고편 감독들과 마케터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여러 번 회자된 예고편들을 중심으로 했고, 그중 독특한 시도나 내적 완성도로 높이 평가받은 작품들을 추려 완성했다. 진정 최고인가 하는 점에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겠지만, 다시 곱씹더라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의 장점은 분명히 갖고 있는 예고편들이다.

<하류인생> : 신중현의 기타 선율위에 강렬한 액션신

뮤직비디오 형식을 취한 <하류인생> 1차 티저 예고편은 던지는 첫인상이 매우 강렬하다. 강한 콘트라스트와 거친 입자로 흔들리는 화면은 군중 액션신과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은 두 주인공의 얼굴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면서 에코 효과를 입힌 낭만적인 대사들로 가끔씩 귓전을 울린다. 공들여 촬영한 연출 컷으로 보이는 이 화면들은 모두 영화에서 따왔다. 이 예고편에서 무엇보다 매력적인 요소는 <하류인생>의 음악감독을 맡은 신중현의 기타 솔로다. 예고편을 제작한 김종원 CF감독은 영화 속에 자주 삽입되는 신중현의 곡 <님은 먼곳에>를 신중현에게 직접 연주해줄 것을 부탁했고, 신중현이 이에 응하면서 지금의 예고편이 완성됐다고 한다.

극장에 공개된 <하류인생> 티저 예고편에 대해서 예고편 전문 감독들의 평가는 의외로 좋지 않다. 공통된 이유는 이미지의 나열만 있고 내러티브상의 강조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영화가 보여줄 바를 상업적 감각으로 잘 전달했다”는 심보경 명필름 이사의 말처럼 마케팅 담당자들의 의견은 대체로 좋은 편이고, 보기 드물게 세련된 비주얼이란 점에서는 양쪽 다 이견이 없었기 때문에 베스트로 꼽았다. 이 예고편 시리즈는 3차까지 준비돼 있다.

<주유소 습격사건> : 클레이메이션이란 신선한 실험

<주유소 습격사건>의 예고편은 영화 예고편으로 보기 드물게 클레이메이션으로 제작됐다. 기획은 CI미디어라는 예고편 제작업체가 맡았고, 제작비 5천만원에 제작기간 석달을 들여 완성했다.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과감했던 시도다. 원래는 예고편 전체를 클레이메이션으로 제작할 의도였으나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았던 터라 어쩔 수 없이 실사와 혼합해서 갔다. 조윤미 마케팅실장은 “클레이메이션은 시간과 돈과 노력과의 싸움”이라며 “이후로 다른 영화들이 클레이메이션을 시도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고 말한다.

이성재, 강성진, 유오성, 유지태 등 주연배우들이 당시 지명도나 관객동원력에서 힘이 약했다는 점도 이 독특한 예고편의 또 다른 제작 배경이다. 창립작품인 만큼 제작사로선 다른 방식으로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필요했고, 마케팅팀 출신으로 이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김미희 대표의 역할이 가장 컸다. 남화정 감독은 “당시로선 센세이셔널했고 선도적이었던 예고편”으로 <주유소 습격사건>의 예고편을 기억하고 있다. 여타 예고편 감독들이나 마케터들 모두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고, 이전에도 이후로도 다시 없을 만큼 독보적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이 베스트에 올랐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 : ‘대사 한마디’로 문제제기와 반전을

“음모닷!” <청풍명월>과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등의 블록버스터 예고편으로 두각을 나타낸 최승원 감독이 국내 최고의 예고편으로 꼽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이 작품은 저 한마디 대사로 초반의 문제제기와 반전을 단숨에 해결한다. 초반 브리핑 장면에서 차분하고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울려퍼지는 장동건의 일본어 대사와 사운드는 캐릭터와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이와난데스까?!”(대체 이유가 뭡니까?!) 강하게 사건에 대해 항의하는 장면으로 전환하는 역동적인 편집. 주요한 설정신에 버무려지는 액션신과 장중한 음악이 2분을 빼곡히 채워낸다. “사이고 이제 더이상 나를 막지 마라.” 반전의 경우처럼 작품에 없는 대사 설정을 통해 작품 전체를 압축시키는 탄탄한 결말을 이끌어낸다. 이 작품은 화려한 이미지나 스펙터클에 의존하는 방식을 탈피하여 내러티브 자체에 대한 탄탄한 해석을 바탕으로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기본기가 훌륭한 예고편이란 바로 이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작품. 튜브 ‘예고편사단’의 최고로 기억되는 최민식 감독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말죽거리 잔혹사> : 티저한편의 서정적인 이미지 광고

35mm 카메라 2대와 16mm 카메라 1대가 동원된 매머드 예고편 작업. 작품의 지휘자는 브랜드위원회의 박찬도 감독. 한달에 4∼5편의 CF작업을 하는 박 감독의 스케줄 탓에 같은 회사 김수 감독이 보조하고, 박찬도 감독이 전체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방향으로 작업이 진행됐다. 주인공 권상우가 워카에 눈이 찢기는 부상을 당하면서 예고편 촬영이 보름이나 지연되고, 제작자와 모든 스탭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십년감수했다는 후문도 유명하다. 처음부터 철저하게 영화제작과 예고편 제작을 별도로 진행한 사례이며, 박찬도 감독이 작업하게 된 동기는 “KTF핌(권상우), 네이버(한가인), 패션 작업(이정진) 등에서 주인공 전부와 작업해봤고 새로운 영상을 원하는 제작사쪽 의도와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티저 속 나지막이 깔리는 내레이션과 기타소리는 영화 속의 70년대 말 분위기를 고스란히 복원한다. 액션장면이 겹쳐지며 동시에 기타소리도 격렬해진다. 소리가 뚝 끊어지는 결말은 권상우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도입과 맞물린다. 영화내용을 서정적으로 담아낸 한편의 이미지 광고 같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TV 스팟 : 내레이션과 이미지의 집중화

장안에 화제가 된 카피 ‘통하였느냐’를 퍼뜨린 일등공신. TV 스팟의 30초라는 ‘시간’적 약점을 역이용하여 강렬한 인상으로 몰고간 작품. 포스터와 스틸사진만으로 구성한 이 작품은 세 주인공의 이미지와 이름만을 보여주고, 카피를 반복한 뒤 퍼즐맞추기의 전부를 보여주듯 전체 포스터를 보여주는 것으로 완결된다. 삽입곡 〈Kinda’ Kinky>와 주인공의 대사 부분이 제시되는 케이블 버전과 달리 스틸 및 포스터 이미지와 내레이션만으로 미니멀하게 전개되는 공중파 버전은 형식상으로도 매우 이채롭다. 공중파 예고편은 할리우드 예고편의 전형적 장점인 내레이션과 이미지의 집중화라는 방법론을 전용한다. 이것은 드라마의 제시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영화 내의 예고편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나 TV 스팟이나 티저에서는 과감하게 호기심을 유발하는 예고편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특히 티저는 짧고 의미심장한 것이 미덕이다. 튜브픽쳐스에서 일하다가 현재는 독립한 최승원 감독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