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영화 예고편 완전정복 [1]
박혜명 2004-03-26

예고편은 왜 본 영화와 따로 놀까

메이킹 필름,드라마 패러디,뮤직 비디오 등 형식&내용 파격 관객몰이 120초의 승부 - 예고편의 ‘때깔’이 달라지고 있다

한국영화의 예고편이 달라지고 있다. 인상적인 영화 컷을 끌어모아 영화의 내용을 미리 알려주던 단순한 클립에서 벗어나 독특한 기획력과 아이디어, 형식이 총동원된 예고편들이, 때로는 영화 본편과는 상관없이 예고편만으로 경쟁하듯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30초에 모든 것을 걸고 소비자에게 구애하는 광고처럼, 지금의 한국영화 예고편들은 2시간짜리 영화를 2분 안에 설명하고 관객의 옷자락까지 물고늘어져야 한다는 자신의 숙명을 너무도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듯하다. 때로는 TV광고보다도 참신한 아이디어로, 때론 본 영화보다도 더 극적인 구성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예고편들. 이런 예고편들이 어떻게 기획되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자세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편집자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를 고집하는 A모씨. <그녀를 믿지 마세요>를 관람하러 극장에 갔다가 이상한 예고편 발견. 칙칙한 화면 위로 음산한 음악이 깔리면서 TV시리즈 〈X파일>의 주인공 스컬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X파일> 뉴 시즌이 나왔나?’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사이 화면에 나타난 배우들은 엄정화와 김주혁. 저들의 대화를 자세히 들어보니 ‘홍반장이 어쩌고저쩌고’ 한다. ‘이게 대체 뭐야?’ 홍반장은 대체 누구고, 엄정화와 김주혁은 대체 왜 저러고 앉아 멀더와 스컬리 흉내를 내고 있지? 궁금함이 극에 달한 A모씨. 그러나 예고편은 잔인하게 끝을 맺는다. 멀더: 우선 홍반장부터 만나봐야겠어요. 스컬리: 기다려요. 영화는 3월에 개봉해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연출예고편<홍반장>

김주혁, 엄정화 주연의 로맨틱코미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틑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하 <홍반장>)은 영화와 전혀 무관한 소재로 티저 예고편을 제작해 업계 안팎으로 화제가 됐던 영화다. <홍반장>뿐 아니라 올해 개봉하는 영화들 중엔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예고편들이 유독 많다. 스탭들의 인터뷰만을 따서 구성한 <태극기 휘날리며>의 티저 예고편, 강렬한 기타 솔로 위에 흑백의 거친 화면을 담아낸 <하류인생>의 1차 티저 예고편, 영화 <챔피언>의 비주얼과 <살인의 추억>의 홍보 카피를 패러디한 <목포는 항구다>의 본 예고편 등 새로운 형식의 예고편들이 마치 경쟁을 벌이듯 선보이고 있다. 이들 예고편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 조성과는 별도로 예고편 자체를 보는 재미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는 점에서 예고편에 대한 기존의 인식 바깥에 있다. 최근엔 예고편을 휴대폰의 유료 콘텐츠로 제공하는 서비스도 실시되고 있는데, 이는 한국영화에 대한 높은 관심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국영화의 예고편이 유료 콘텐츠로 손색이 없을 만큼 자체 경쟁력을 지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단순 영화 소개에서 마케팅의 일환으로

이전이라고 독특한 형식의 예고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처녀들의 저녁식사> 예고편, 영화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면서 영화와 별개로 촬영된 <시월애> 예고편, 클레이메이션 형식의 <주유소 습격사건> 예고편, 강한 콘트라스트의 흑백 비주얼만으로 충격적인 반전과 호기심을 자극했던 〈H> 티저 예고편 등은 색다른 시도로 영화와 상관없이 화제에 올랐던 예고편들이다. 그러나 이런 예고편들은 주로 일부 영화사들이 주도한 세심한 마케팅 전략의 일부였으며 당시로선 드문 경우에 속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이 한국영화 예고편의 주요한 경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온라인 입소문 타기, 동영상이 효과적

그렇다면 왜? 영화 마케터들이나 예고편 감독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인터넷으로 인해 동영상에 대한 접근이 쉬워졌기 때문”이다. 권영주 화이트리엔터테인먼트 기획실장은 “과거의 홍보는 지면 위주였지만, 일단 매체비가 상승하고 TV광고가 가능해지고 타깃이 어려지면서 동영상의 비중이 높아졌다”라고 부연설명한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 예고편이라고 하면 조감독이 NG컷을 길이에 맞게 편집하는 정도였고, 좀더 신경을 쓴다 해도 감독이 OK컷과 NG컷을 섞어서 직접 편집하던 것이 전부였다. 예고편을 통해 관객을 후크한다는 마케팅적 개념을 끌어들이기보다 영화를 단순히 소개하는 데 중심을 둔 홍보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제작편수가 증가하고 시장이 확대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영화들간의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 됐고, 이와 맞물려 예고편 전문 제작업체들이 등장하면서 한국영화는 기획력과 아이디어, 완성도로 승부하는 예고편을 앞다투어 내놓기 시작했다.

CG를 코믹하게 활용한 <집으로…> 예고편

불을 지핀 것이 지난해 나온 <집으로…>와 <싱글즈>의 예고편이다. <집으로…> 예고편은 튜브픽쳐스 영상제작팀의 이현식 감독이 만들었는데, 어린 소년과 할머니의 캐릭터를 코믹하게 설정하고 이에 걸맞은 아기자기한 CG로 효과를 내고 있다. 튜브픽쳐스 황우현 대표가 “이 예고편 이후에 화면 위에다 말풍선이나 귀여운 글씨체, 만화 같은 화면을 쓰는 예고편들이 줄줄이 나왔다”고 단정할 만큼 <집으로…>의 예고편은 대부분의 코미디영화의 예고편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요소를 처음으로 활용한 예다. CF프로덕션 알파빌44 소속의 이성호 감독이 제작한 <싱글즈>의 예고편은 연출예고편의 성공적인 사례. 여름에 개봉한 이 영화는 마케팅을 담당했던 싸이더스 관계자에 따르면 “<나쁜 녀석들2> 등과 경쟁해서 기죽지 않기 위해 일부러 컨셉을 세게 잡는” 전략을 택했다. 블록버스터와는 다른 방식으로 돋보이기 위해 별개의 콘티로 예고편 전체를 새로 촬영하면서, 퀄리티 높은 비주얼과 ‘급하다고 아무거나 먹지 말자’식의 자극적인 카피로 타깃 관객층에게 정확히 소구했다. 무엇보다도 이 예고편은 때깔있는 싱글 여성들의 섹스생활을 코믹하게 풀어냄으로써 예고편 자체가 주는 재미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이런 예고편들이 예고편 자체로도 화제가 되고 더불어 영화도 흥행하면서 이후 예고편 제작 경향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아이디어는 좀더 다양해져서 TV프로그램 <주말의 명화>를 패러디한 <광복절특사> 예고편, 할리우드식 내레이션을 삽입한 <광복절특사>, TV드라마 <다모>를 패러디한 <내사랑 싸가지> 예고편 등이 등장했다. 예고편 감독들은 “예고편 따로 찍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전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예고편을 제일 잘 만들 거다”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면서도 이러한 예고편들이 경쟁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한국영화 예고편엔 내레이션이 강화돼 있지 않다는 점을 든다. 할리우드 예고편의 경우 돈 라폰테인으로 대표되는 예고편 전문 성우들이 영화를 죽 설명하는 동안 화면은 은유적인 편집만으로도 많은 임팩트를 줄 수 있지만 한국영화 예고편은 사정이 다르다는 것. 편집의 묘미만 살리자니 드라마를 설명해야 하고, 그걸 다 자막으로 대체하자니 리듬이 떨어지는 식이다. 물론 할리우드 예고편들은 지나치게 패턴화돼 있어서 예고편 자체를 보는 재미가 훨씬 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예고편 작업에서는 훌륭한 교과서 역할을 한다고 예고편 감독들은 입을 모은다. 국내에서는 채은석 CF감독이 제작한 <살인의 추억> 예고편이나 용이 감독이 만든 <올드보이>의 예고편이 세련된 편집감만으로 예고편 보는 재미에 충실했던 경우다. 특히 <살인의 추억> 예고편에서는 연기처럼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자막효과와 바람소리를 닮은 음향효과도 인상적인 크리에이티브다.

두뇌게임이다, 일단 튀어라

영화 속 여주인공이 출연했던 드라마를 패러디한 <내사랑 싸가지>예고편

관객으로서는 예고편 자체를 보는 재미, 예고편 감독으로서는 예고편을 돋보이게 하는 크리에이티브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예고편은 단지 영화를 홍보하는 광고물이 아니라 광고적인 성격의 영화로도 볼 수 있다. 기획력과 아이디어가 강조된 연출예고편 혹은 비주얼적인 효과에 중점을 두는 예고편들의 경우 예고편 감독의 크리에이티브가 너무나 확연하기 때문에 이때는 엄연히 영화와 독립된 광고로 볼 수 있다. <홍반장>의 예고편을 제작한 이규홍 감독은 “연출예고편에 대한 욕심은 예고편 감독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라면서 “영화와 별개의 연출이라는 걸 알면서도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게 연출예고편의 묘미”라고 말한다. 반면 영화의 컷만으로 만들어지는 예고편을 고집하는 감독들은 편집에 집중하고 약간의 변형만 가함으로써 영화에 대한 기대치를 확 끌어올리는 것이 예고편 제작의 진정한 크리에이티브라고 말한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예고편을 제작했던 남화정 감독은 “아이디어만 앞서가면 영화 자체는 묻힐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기획성 예고편들의 부작용을 점친다.

분명한 것은 어쨌거나 현재의 한국영화 예고편이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마케팅 컨셉을 공유하되 전혀 다른 기획력과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독립 크리에이티브의 결과물이거나, 영화 안에서 모든 매력과 장점을 찾아내어 취사선택하는 고전적 방식, 즉 편집의 미학으로 완성된 결과물이거나. 어느 쪽이건 영화 예고편이 영화의 주제와 컨셉을 떠날 수 없다는 점에서 가장 좋은 예고편의 정의는 간단하다. 영화가 재미있어 보이게끔 하고 그것이 흥행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 것. 영화가 가진 장점을 충분히 끌어내는 동시에 필요한 말만을 하고, 동시에 영화적인 재미는 실제보다 20∼30% 정도 더 돋보이게 함으로써 관객이 그 영화에 꽂히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예고편의 사명이고 예고편 감독들이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한국영화의 예고편은 지금 온갖 다양한 방식의 크리에이티브를 총동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