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빅 피쉬>의 구라 정신에 공감하다
“병장 때는 애들 다 잡았지”, “이등병 때 많이 맞았지”로 시작되는 군대 이야기는 남성 마초의 신화적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도 여전히 술자리의 단골 레퍼토리다. 군대 이야기도 싫고 축구 이야기도 싫지만,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가 가장 싫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니. 하지만 얼마 전 조재현이 코미디 프로에서 군대 구라의 결정판을 내놓았을 때, 친구들이 군대 얘기만 꺼내면 딴청을 피웠던 기억들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좀 더 열심히 맞장구 치며 들어둘 걸. 입대 직후 눈물로 얼룩진 옷과 소지품을 집으로 부치는데, 조재현 같은 ‘짝퉁’ 군인의 경우 짐보다 사람이 먼저 도착할 거라는 차인표의 넉살은 압권이었다. 친구들의 ‘군대뻥’은 3년 안팎의 의미 없는 시간들의 권태와 무기력을 잊는 유일한 무기가 아니었을까.
영화 <빅 피쉬>는 한술 더 떠, ‘무기로서의 구라’의 수준을 넘는다. 삶 자체가 구라이며 구라 자체가 예술이 되는 경지다. 건조한 사실을 전달하는 기자 출신의 아들보다도 ‘뻥빨’ 없이는 한 문장도 끝맺지 못하는 아버지의 입심이 사랑 받는다. 고상한 육하원칙을 지킨 객관적 기사는 웃음을 선물하긴 힘들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구라를 ‘재밌지만 가짜인’이 아니라 ‘가짜이지만 행복한’ 판타지로 받아들인다. 아버지의 유일한 진실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이기에, 그 거짓말은 애초에 진리의 재판관을 피할 수 있다. 진통제는 건강증진 혹은 진리탐구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지만, 환자의 ‘행복’에 기여함으로써 신음과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다. 아버지의 구라 역시 사실을 규명하는데는 무익하지만 벗들의 고단한 일상을 웃음으로 위무하는 일등공신이다.
<빅 피쉬>의 거짓말에는 어떤 마초적 구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유쾌하지만 엄격한 게임의 법칙이 있다. 우선 에드워드에게는 장금이와 맞먹는 가열찬 호기심이 따라붙는다. 만만하고 낯익은 길보다는 늘 새롭고 험난한 길을 택하는 그는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다. “난 더 좋은 곳을 찾아 떠나는 게 아냐.” 안정된 일상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매일 새로이 살 떨리는 모험을 감행키 위해, 그는 걸핏하면 어디론가 떠난다. 그의 구라의 힘은 ‘잡스러움’ 혹은 ‘비정상인’과 연대할 때 가장 명랑한 빛을 뿜는다. 그는 거인과도, 샴쌍둥이와도, 늑대인간과도, 은행털이와도 친구가 됨으로써 늘 새로운 삶을 쟁취한다. 지상의 모든 이질성과 찐하게 두루치기 하는 장쾌한 구라의 여정 속에서, 진리의 객관성과 제도의 합리성은 더 이상 유목민적 삶의 장애물이 될 수 없다.
조선후기, 반역도 역모도 아닌 ‘괴이한 문체’로 인해 사대부 신분까지 박탈당한 이옥(李鈺)이라는 문인이 있다. 문체는 액세서리가 아니라 ‘정신의 뇌관’임을 예민하게 감지한 국왕 정조에게, 이옥의 날티 나는 문장은 가혹한 징계감이었다. 지고지순한 모범적 글쓰기에는 당최 소질이 없었던 그에게 과거 시험 7전 7패보다도 고통스러운 건 ‘권태’였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3류 인생들의 이야기의 힘이었다. 그의 글에는 지엄한 가문의 앳된 청년이 늙은 기녀를 짝사랑하며 애태우고, 지아비를 아홉 번 바꾼 행복한 과부가 아홉 명의 죽은 남편을 거느린 채 함께 묻혀 있으며, 의협심으로 똘똘 뭉친 프롤레타리아 기생이 자신에게 ‘밤’을 구걸하는 선비들에게 퍼붓는 통쾌한 구토가 있다. 그는 붓끝에 달린 날카로운 혀로 저잣거리의 팍팍함과 익살을 담아냄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스스로를 구원한다. <빅 피쉬>를 통해 온갖 전래동화의 2탄, 3탄을 지어내어 동생에게 들려주며 늦은 밤 ‘푸세식’ 화장실의 공포를 견뎠던 어린 시절과 만난다. <빅 피쉬>는 세상의 모든 구라쟁이 이야기꾼들에게 무한한 용기를 들이붓는다. 태초에 이야기 혹은 구라가 있었다.정여울 / 미디어 헌터 suburb@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