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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 <송환>을 보다
2004-03-24

임순례 감독, <송환>을 만나다

영화는 김동원 감독의 약간 나른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의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되었다. 촬영을 시작하던 1992년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배경과 이 다큐를 찍게 된 자신의 내적/외적 동기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이어진다.

다큐에서 1인칭 내레이션은 가장 손쉽고 진부한 방식이기도 하지만 또 관객에게 신뢰를 주는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차분하면서도 듣기에 편안한 음색과 발음이 일단 2시간30분여에 이르는 긴 시간을 이끌어가는 데 무리가 없다(러닝타임에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하나도 안 지루하니까~).

인간에 대한 예의

감독의 모든 설명이 있고난 영화의 초반부, 무료요양원에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을 모시러 간 감독은 두 할아버지 사이에 끼어 앉게 된 자신의 처지를 매우 어색해하면서도 자리를 바꾸는 시도를 하지 않고 그 어색함을 끝까지 견디어낸다.

어떤 자리에서도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조심성과 인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그의 스타일의 한 단면이라고 보는데, 영화 내내 이런 자세는 줄곧 견지된다. 좀더 세련된 화면을 위한 시도, 좀더 나은 음질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에 있어 그에게 판단기준이 되는 것은 언제나 촬영대상에 대한 예의였다. 영화쟁이의 이기적 욕심보다는 자기가 상대하고 있는 인물에 대한 인간적 예우를 갖추는 그의 태도가 이 영화의 기술적 촌스러움과 내용적인 풍성함을 동시에 가져다준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이 태도는 찍히는 대상에게서 강제로 어떤 말과 행동을 얻어내기보다는 자연스러움을 유도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극영화와 달리(바늘끝만한 차이의 ‘완벽성’과 ‘치밀함’을 얻기 위해 배우와 스탭을 혹은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고문하는 악명 높은 감독의 이야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듣고 있는가?) 다큐멘터리에서는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간의 인간적 관계나 도덕적-윤리적 판단부분이 매우 주요한 화두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김동원 감독이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를 대하는 방식과 그들을 찍는 태도에서 겸손함과 진지함을 읽어내고는 감독에 대한 신뢰항목에 한표를 추가하게 되는 것이다.

무료요양원에서 한동안 같이 지내던 할아버지들을 떠나보내는 평범한 두명의 할머니들(내가 섣불리 판단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은 아마 평생을 이데올로기나 신념이라는 단어와는 무관하게 살아오신 분들처럼 보였다)의 몸짓과 대사에서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대단히 드라마틱한 장면도 아니었는데 눈물이 난 건 그중 한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마지막 포옹을 하면서 “아이구 내가 왜 눈물이 나냐.씨팔”이라는 간단한 대사가 내 귀에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조폭영화에서 질리도록 들어온 ‘씨’로 시작되는 그 단어 한마디가 그 할머니가 살아온 신산스러웠을 70여 평생을 상기시켜주면서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영화(극영화의 초반 5분간은 더 그렇다)에서 초반은 아주 중요하다. 앞으로 영화가 흘러갈 톤을 예시해주기 때문이다.

요양소에서 나와 봉고차에 타신 김석형 선생께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언급하면서 그 범죄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웃으면서 농담하시는 장면에서 이 영화가 그동안 우리가 정치적 이슈를 다룬 한국다큐에서 사실 늘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지나치게 진지하고 고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려고 하는구나 하는 징후를 처음 느꼈다.

비극과 희극의 ‘절묘한 배합’

<송환>에는 가슴을 후리는 눈물과 감동은 물론, 어느 상업영화 부럽지 않은 웃음과 유머도 상당부분 내포되어 있는데 이 두 가지 요소의 절묘한 배합을 보면서 김동원 감독의 관객 장악력에 대한 무공에 감탄하게 되었다.

가장 웃긴 장면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취임 연설장면이었는데 ‘민족’을 ‘민조’로 ‘사상’을 ‘상상’으로 발음하는 것이었다. <송환>에 대한 일부 평가 중에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가 인용되기도 하였는데 아마 이 장면을 처리하는 감독의 연출력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닐까 싶다. 김동원 감독은 김영삼의 잘못된 발음이 나오는 장면을 잠깐 스톱모션으로 정지시키면서 ‘삑’ 소리가 나는 전자음향을 사용하는데, 자막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웃기면서도 형식의 자유로움이 묻어져 나왔다. 이 정지기법은 나중에 안학섭 선생이 꽃다발에 대해 언급할 때도 요긴하게 쓰인다.

개인적으로 지금도 궁금한 게 있다. 대부분 이런 실수는 남이 써준 원고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읽을 때 발생하는 게 보통인데, 김영삼의 경우 분명히 이 부분에서 원고를 보지 않고 거의 즉흥연설을 하는 듯한 상태였으므로 실수의 이유는 미스터리로 남는다.

이 영화에서의 웃음은 인물들의 캐릭터에서 온다. 등장인물 중 가장 까다롭고 원칙적인 인물인 안학섭 선생이 출소 당시 자신들의 복역 햇수에 따라 차등지어진 꽃다발의 크기에 대해 울분을 토하실 때 발생하는 웃음이 바로 그렇다.

나이팅게일이 마음이 아주 착한 사람을 지칭한다는 것까지만 아시는 김영식 선생께서 자기를 고문한 모든 이들이 남자였음을 상기시킨 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아들을 낳으려면 나이팅게일 같은 사람을 낳아야 돼!”라고 말씀하실 때 주는 웃음은 말하자면 위의 웃음과 종류가 또 다른 ‘슬픈 웃음’이다.

이 영화에 있어서 감독 자신이 조창손 선생의 겸손하고 예의바르면서도 품위있는 인간성에 끌려서 영화를 시작했고 그에 대한 애정이 영화를 마무리짓게 하는 힘이었다고 고백했듯, 이 영화를 끌고가는 힘의 상당부분은 등장인물의 매력에서 기인한다. 큰 대가를 치르고 지켜낸 신념 덕으로 인해 그들은 비교적 눈빛이 흐린 다른 노인들에 비해 자기 중심이 있어 보였고 비판적 의식과 인간적 품위도 돋보였다.자의는 아니었을지언정 복잡하고 세속적인 가정사로부터 유리된 사실로부터 오는 어린애 같은 순수함도 있어 장기수 할아버지들 대부분은 매력있게 느껴졌다.

김영식 선생은 여러 선생들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가 처음에 지방의 한 허름한 식당에서 조창손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로 한껏 주눅들어 있던 그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매력만점의 인물로 변해간다.

전향한 장기수인 김영식 선생은, 그런 용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더블 마이너리티’이다. 그가 자기를 이해주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며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따듯하고 긍정적인 그의 내면의 모습이, 어려운 상황을 늘 건강하게 이겨내는 우리네 민초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음을 느꼈다. 그가 민족과 역사에 대해 어눌하게 한마디 하면(그 어렵던 일제시대, 한국전쟁 직후에도 민족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버린 적은 없지만 요즘은 "썩을 놈의 세상”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는…) 지식과 논리로 무장된 그 어떤 웅변보다도 호소력이 있다.

이데올로기 너머 인생이 있다

이 영화의 미덕 중 하나는 감독이 비전향 장기수들을 보는 시선이 매우 따듯하면서도 객관적인 시선을 잃지 않는 균형감이 있다는 점이다. 선생들의 장점도 결코 놓치지 않지만 선생들의 한계에 대한 지적도 잊지 않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

‘납북’이라는 단어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선생들의 경직성을 보면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영화엔 극적 반전도 있다. 송환이 결정된 뒤 안학섭 선생이 북한행을 마다하고 결혼을 선언하신 것이다. 의외의 인물이 의외의 선택을 한 점이 놀라웠다.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조창손 선생과 김동원 감독의 아이들의 교유부분이 빠진 것이었다. 조선생과 김동원 감독을 이어준 매개체이기도 한 감독의 아이들은 아주 어릴적 사진으로만 보여지는데, 영화를 찍는 십여년의 세월동안 이 아이들의 외모만큼이나 생각에도 성장과 변화가 있을터인데, 중요성에 비해 비중이 적은점이 약간 의아하게 느껴졌다.

또하나 개인적인 아쉬움은 안학섭 선생의 결혼 특히 부인에 대해 너무 설명이 적은 점이었는데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 측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런닝타임의 애로 때문에 누락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쉽지않은 결정을 내린 이면의 얘기가 궁금했다.

사실 이 작품은 전달해야 하는 정보와 등장인물의 숫자가 많고 인용자료 화면의 형태도 다양하며, 다루고자 하는 소주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얼핏 매우 산만하고 급한 호흡으로 흘러갈 여지가 다분한데도 반대로 여유와 여백이 느껴진다.

중심을 갖고 이야기를 차분하게 정리해 내면서 눈물과 웃음, 감동과 성찰을 양념으로 버무려 멋진 요리를 만들어낸 감독의 솜씨가 한껏 무르익었음을 새삼 느낀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송환>을 2003년 최고의 영화로 평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전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얼마전 도쿄에 갔었는데 김동원 감독과 오랜 친분이 있는 한 일본 영화인이 <송환> 상영소식을 듣고 만약 이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되면 정치적으로 좀 ‘논란’이 있지 않을까라는 우려섞인 질문을 했다. 나의 대답은 그런 일이 없을 것 같다는 것이었는데 이유는 “골수보수들이 영화를 보러 올 정도로 한국 예술영화 관객의 저변은 넓지 않으므로…”였다. 제발 논란이 되어도 좋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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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