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표현한다는 게 쉽지 않다.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천진함, 그리고 곧바로 이를 뒤집는 놀라운 영리함. 영화 <아홉살 인생>의 두 주인공이자 초등학교 6학년 동갑내기인 김석과 이세영은 오랜(?) 연예계 생활로 터득한 눈치의 촉수까지 발달해 있어 더욱 감잡기 힘든 대상이다. 영화 속의 여민과 우림이 어른의 눈에 비친 아이들이기에 생동감이 덜했다면, 이 날것 그대로의 두 아이들은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얼마나 편견 속에서 움직이는지 순간순간 방증해 보이고 있다. 둘과의 대화를 여기 고스란히 옮겨적는 것은 그들의 불명확한 세상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세영 : (아까부터 잡담 중) 그러니까 피가 나서 (석이의) 남방이 빨갛게 물들었잖아요.
석 : 빨리 인터뷰 들어가세요. 우리 빨리 가자면서요. (기자의 휴대폰을 집어들고) 이거 6400(모델명)이에요, 6800이에요?
세영 : 언니, 명함 주세요. (없다는 대답을 듣고) 그럼 즉석으로라도 써주세요. 심심하면 전화하게요. 언니 이름도요. 그리고 <씨네21>에 <아홉살 인생> 때 인터뷰했다는 것도 적어주세요. 안 그러면 나중에 다 잊어버리거든요.
석 : (기자의 휴대폰으로 노래를 틀어놓더니) 오예∼.
정신없이 시작된 인터뷰. 영화의 원작소설을 읽어봤느냐는, 제법 무게있는 질문으로 간신히 진행됐다.
세영 : 촬영하기 전에. 도서관에서 한번, 제대로 읽진 못했는데, 엄마도 모르시는데 그냥 한번 읽어본 적은 있었거든요. 근데 그거 한다고 (영화 찍는다니까) 영화사에서 다시 한번 읽어봤어요. 첨에 읽었을 때는 진짜로 〈!느낌표〉에 나왔기에 그냥, 살 순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궁금해서 보잖아요. 그래서 봤는데, 재미도 있고, 요즘에는 막 지어내서 창작동화 같은 거, 코드가 좀 다른 거 같아요, <아홉살 인생>은.
석 : 음, 읽으니까는… 읽으니까요, 근데 재미는 있는 거 같았는데요, 그렇게 재밌는 건 아닌데 재밌는 거 같았는데요, 근데 <아홉살 인생> 그거랑 다르잖아요. 영화랑 책이랑, 시나리오랑 책이랑. 근데 어떤 점에선 시나리오가 더 괜찮은 거 같고 어떤 점에선 책이 더 좋은 거 같고 그런 거 같아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는 요구에) 근데 어떤 장면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요.
다른 질문을 던진다. 어른스럽고 터프한 신사 여민이를, 장난꾸러기에다 상대방을 적절히 무시할 줄도 아는 꾀돌이 석이가 어떻게 이해하고 연기했는지 궁금하다. 나름대로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긴 질문을 던지고 나자 배우 김석, 오히려 질문을 이해 못하고 잠시 침묵을 유지하더니 힘겹게 입을 뗀다.
석 : 잘… 이해가 안 가죠. 근데 제가 어떻게 연기를 했냐면, 그냥 시나리오나 대본 같은 걸 보면은 그냥 그걸 죽 이어오면은 그 감정 그대로 가는 건데? (당연한 왜 묻냐는 듯) 뭐, 우림이가 (전학을) 간다고 그러면 슬픈 감정으로 가야 되는 거고. 그런 거죠.
세영에겐 촬영 중에 쓴 일기에서 ‘우림이의 속내가 궁금하다’는 구절을 읽었다고 말을 건넸다. 정말 그 속내가 궁금했을지가 궁금했다.
세영 : 네. 근데 사실은, (갑자기 어조가 좀 높아지며) 이거, 이거 그대로 써주세요? 그대로? 지금 이 말도? (잠시 숨을 가다듬더니) 거기 홍보팀 언니가 무슨 맨 처음에, 어디, 으음, 맨 처음에 포스터 찍느라고 어딜 갔어요. 근데 일기장 얘기를 내가 어쩌다가 나왔거든요? 근데….
석 : (카메라 기자의 사진기를 정신없이 만지작거리다 말고) 그거 니가 얘기했냐?
세영 : 아 들어봐. 그랬는데, (석이가 다시 사진기에 몰두하는 동안 꿋꿋이 말을 이어나가며) 그랬는데, 그 일기장에 그냥 언니가 생각하는 걸로 봐서는 이렇게, 뭐 속내도 궁금하고, 뭐 그런 식으로 써달라고 그러고, 그냥 있는 니 생각대로 하면 되는데, 언니 말로는 그래도, 어떤 바람이 있잖아요. 눈치를 보면 알잖아요. 그러니까 그렇다고 말은 안 해도 그런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해줘야 나중에 홍보할 때, 그게 된다고, 그러니까 일기에도 우림이처럼 그렇게 써야 된다고, 그래서 그렇게 썼어요. (홀가분해하는 미소)
석 : (카메라에서 관심을 떼더니) 근데 솔직히 말하면요, 우림이처럼 쓰는 게 아니라요, 원래 이 영화 전부터 우림이였어요.
세영 : 아니야. 난 금복이였어.
석 : 우림이였어.
세영 : 금복이였어.
석 : 우림이였어. 무슨 얘기야.
세영 : 나 새침데기 아닌데?
석 : 새침데기에다 변덕쟁이. (목소리를 설득조로 바꾸더니) 그래도 금복이는요, 와락하는 성격이잖아요.
세영 : 왈가닥, 왈가닥.
석 : 그러니까 그런 성격이잖아요. 근데 얘는, 왈가닥도 아니고, 완전 막, 금복이가 튕기고 그러지는 않잖아요. 근데 얘는 막 튕기고. 애가 완전히….
얘기하는 중에 아이들의 보호자들이 스튜디오로 도착한다. 세영이가 분장실 안으로 들어가자고 조른다. 하도 간곡히 조르는 통에 석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폐된 공간으로 일동 자리를 옮긴다.
짓궂은 질문을 던져본다. 누가 NG를 많이 냈나?
석 : 세영이요.
세영 : 뭐야. 왜 나한테 그래. 난 별로 낸 적 없어.
석 : 야, 니, 3일 찍은 것도 있잖아. 3일. 얘 3일 동안 계속 찍은 것도 있어요. 한신 가지고 3일 동안 찍는 사람이 어딨어.
세영 : 그거는, 맨 마지막에 내용이 자꾸 바뀌니까 그렇지.
석 : (세영의 대답에 오버랩되어) 한신 가지고 3일 동안 찍는 사람이 어딨니∼.
세영 : 그게 맨 마지막에 전학 가는 신이 있었는데 그때 대사가 되게 길었거든요. 그래서 다 외워 갔는데….
석 : 야, 그게 길긴 뭐가 기니? 난 A4 용지 앞뒷면으로 두장도 외웠다.
세영 : 원래는 되게 길었었어요. 근데 바뀐 거예요. 일부분일부분 바뀌었는데 자꾸 바뀌니까, 순서도 그렇고, 되게 어려워가지고…. 두 번째에는 감정이 잘 안 잡혀가지고….
석 : 쟤는 안 긴 거라니까요.
세영 : (NG낼 때 기분을 묻자) 되게 미안하죠. 근데 제가 이걸 하면서 느꼈는데, 이거는, 틀리더라도, 미안은 한데, 그걸 너무 막 티내지 않고 여유롭게, 너무 막 조급해하지 말고 그래야 되는 거 같아요. 미안해가지고, 당황해가지고 또 틀리고.
석 : 저는 NG 별로 안 냈어요. 아니, NG가 나긴 났는데요, 많이 났는데요, 어∼ 엄청나게 많이 났는데요, 기억을 못하겠어요. (장난기 더욱 발동하더니) 힘든 장면도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지∼인짜 많았는데요, 좋은 영화를 위해서 제 풍부한 감정을 모두 소화해내서 끝까아∼지 했죠. (손짓발짓) 언더스탠? (이 장난이 안 통하는 상황인 걸 바로 파악한 뒤) 저 그런 부분은 많았어요. 이번 <아홉살 인생> 영화할 때, 선생님한테 맞을 때나, 아니면….
세영 : 근데, 어려운 신일수록 대부분 NG가 안 나는데, 오히려 그만큼 노력을 해서 갔기 때문에. 오히려 쉬운 신에서 이렇게 맘놓고 하다가 틀리는 것 같아요.
아, 이게 제일 많이 났어요. 금복이한테 따귀맞는 신이 있었는데, 그때 직접 때리잖아요, 근데 금복이가 손이 매운 게 아니라 진짜로 세게 때리니까 세게 때리는 건데, 감독님이 액션이 커야 더 아파 보이는데 액션이 안 크니까 뺨만 아프잖아요. 이렇게 확 돌려야 되는데, 상체까지. 것도 되게 많이 했어요. 연습한다고 10번 때리고.
석 : 니는 그건 장난이야. 너 엄마한테 맞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알어? 잘 봐. 다섯번을 했다. 다섯번만 하는데, 한번 하는 데 서른네대씩 넣어. 한번 하는 데 서른네대씩이면, 내가 34번을 다섯번 했다. (한 테이크에 34대씩 맞고, 총다섯 테이크를 갔다는 뜻.)
세영 : 그만 해, 그만 해.
석 : 그럼 몇대냐?
세영 : 오사이십. 오삼십오. 170.
석 : 170대지? 그리고 또 인서트 컷 따느라고 서른다섯번 때렸다. 그걸 두번 했어. 그럼 몇대냐?
세영 : 근데, 솔직히 말하면 인서트 땐 때리는 시늉만 하지 않냐?
석 : 아니. 인서트 할 때 실제로 때리구요, 얼굴 딸 때 때리는 시늉만 하지. 뭘 모르네, 아직. 산에 내려올 때가 아직 안 됐다. 다시 올라가라.
석이와 세영인 네댓살부터 연기를 시작했고 드라마와 영화 모두 골고루 경력을 갖고 있다. 석이는 <넘버.3> <킬리만자로> <도둑맞곤 못살아> <선생 김봉두>에 이어서 이번 영화가 다섯 번째 작품. 세영이는 최근 개봉한 <고독이 몸부림칠 때>와 단편영화를 포함해 이번이 세 번째다. 두 사람은 <내사랑 팥쥐>에서 함께 연기한 적이 있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 ‘재회’했다는 느낌은 없는 듯하다. 그땐 3∼4회밖에 촬영분량이 없어서 서로 말도 잘 안 했었다고 세영이가 설명한다.
석이는 8살 때부터 승마를 시작해 연기와 학업까지 병행하고 있다. 전국 규모의 승마대회에서 1, 2위를 놓치지 않으면서 전교어린이회 부회장까지 겸할 정도로 모든 면에 열심이고 자신만만하다. 그렇게 열심히 장난을 치던 애가 카메라 앞에서 매컷 진지하게 포즈와 표정을 바꾼다. <아홉살 인생>에서 여민의 카리스마가 순전히 아이의 연기였다는 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세영이는 “아동복을 많이 찍어봐서 옷이 예쁘게 살아나게 찍는 게 익숙하다보니 동작이 다양하게 잘 안 나온다”고 누가 묻지 않아도 먼저 설명할 만큼 눈치가 빠른 아이다. “근데 이 말은 쓰시면 안 돼요”라고 기자에게 언질을 던지는가 하면 “방송용으로 해야지, 방송용” 하며 철없이 대답하는 석이에게 핀잔을 주고, 조금 뒤 석이가 다음 작품 이야기를 꺼내자 “그 얘기는 하면 안 되는데. 지금 우리 영화 홍보하는 거잖아요”라며 예민해 하기까지 한다. 세영이에게서 거의 반사적으로 나오는 몇 가지 ‘연예인들의 행동규칙’을 보고 있으면 이 역시 그저 평범한 아이와의 대화는 아니란 점을 새삼 상기케 된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 세계의 이전 단계가 결코 아닌 듯하다. 어림잡아 눈높이를 낮춰도 아이들의 세계를 다 볼 수 없다. 두 세계는 그저 서로 평등한 채 교집합만 있는 게 아닐까. 대강의 짐작과 말주변으로 아이들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어른들의 오판일 것이다. 두어 시간을 스튜디오에서 함께했지만 다음번에 세영이와 석이를 다시 만나면 왠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박혜명·사진 이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