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보고 소통의 어려움을 재발견하다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장면을 전화 너머로 발각당한 남자에게, 눈 큰 여자는 더듬거린다. “잠깐만, 한 시간 정도만 통화하자.” 이 광고 시리즈 2탄. “내가 널 왜 만나니?”라며 어이없어하는 그녀에게 눈 큰 여자는 ‘심한’ 욕설을 날린다. “이…… 민들레야!” 이들의 ‘긴∼ 통화’는 일면식도 없는 두 여자 사이의 미묘한 소통을 예감케 한다. 그녀가 눈 큰 여자에게 느끼는 호기심은 “너 한 시간 동안 통화한다며?”라는 ‘비웃음’에 역설적으로 녹아 있다. 3탄에서는 그녀가 오히려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며 ‘한 시간 통화를 꿈꾸는 바보’로 전향한다. “내게도 시간을 줘. 한 시간만.” 이 CF는 삼각관계에서의 승리를 욕망하는 텍스트로 읽히지 않는다. 수화기가 불덩이가 되어 귀가 떨어져나갈 듯한 아픔을 참으면서도 긴 통화를 열망하는, 사랑이 아닌 소통 그 자체에 목말라하는 불안을 담은 텍스트로 다가온다.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모든 소통이 가로막힌 이국의 장소에서 시작된다. CF감독은 침 튀기며 광고 컨셉을 장황하게 늘어놓지만 통역은 “좀더 강렬하게!”가 전부다. 번역 과정에서 사라지는 의미에 대한 안타까움과 불안이 영화 초반을 잠식한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소통 불가능성은 차라리 언어도 일상도 ‘동질적인’ 미국인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누구와 결혼했는지 모르겠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라며 눈물 흘리는 샬롯의 절박함에, 미국의 친구는 ‘바쁨’으로 화답한다. “미안, 방금 뭐라고 했지?” 밥이 고민을 털어놓으려는 찰나마다, 아내는 가사의 격무와 아이들의 대소사를 매우 지적인 말투로 설명한다. 영화 초반에서 모든 소통은 곧 ‘불가능한 번역’이다. 그것도 모든 절실한 의미를 휘발시켜버리는 서툴고 무성의한 번역.
누군가의 하찮은 상처에 귀기울일 때, 뜻밖의 소통이 시작된다. 권태에 지친 샬롯이 방 안을 꽃으로 장식하다 가구에 발가락을 호되게 찧는 장면. 나와 옆자리의 여자 관객은 동시에 소리쳤다. “진짜 아프겠다!” 내가 다치기라도 한 듯 몸 구석구석의 상처의 기억들이 전율을 전해왔다. 소리라도 꽥 질러 고통을 나눌 상대가 없다보면 어느새 기원을 알 수 없는 상처들이 늘어만 간다. 샬롯이 ‘하찮은’ 발가락의 상처를 보여주자 밥은 꺼멓게 죽어가는 발가락에 흠칫 놀라며 초밥집 종업원에게 영어로 말을 건다. “여긴 발가락으로도 초밥을 만드나요?” “나이프 가진 거 있어요?” 종업원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샬롯은 처음으로 자신의 상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난다. 중요한 것은 소통의 ‘내용’이 아니라 소통에 임하는 ‘형식’ 혹은 ‘태도’가 아닐까.
‘섹스없는 베드신’이 언제 나오나, 눈을 반짝이며 기다렸다. 웬걸, 별 ‘내용’이 없었다. 그런데 경이롭게도 두 사람은 25살과 52살의 자리를 기꺼이 바꾼다. 이들이 소통에 임하는 ‘태도’는 쿨함과도 집착과도 다른, 순연한 진지함이다. “어머, 웬일이니!”가 아니라 “나도 그래”라고 답하는.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독특한 어법이 있다. 그래서 어쩌면 소통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번역인지 모른다. <러브 레터>의 여주인공은 죽은 사람에게, 그것도 주소도 불분명한 집에 편지를 쓴다. 사라지고 비틀리고 외면당하는 의미에 집착하기보다 길바닥에 편지질을 해서라도 죽은 사람의 목소리와 만나려는 몸짓 하나가 소중하다. 그 오랜 소통의 갈급함 뒤에 ‘겨우’ 튀어나온 말은 ‘오겡키데스까’라는 텅 빈 기표였다. 그러나 관객은 그 ‘기의’없는 소통의 목마름을 기꺼이 이해한다. 번역의 필요조건은 50%의 텍스트 이해 능력, 30%의 한국어 능력, 20%의 외국어 능력이라 한다. 이 50%의 텍스트 이해력이란 곧 척하면 짠 알아듣는 눈치와 텍스트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버무린 무언가가 아닐까. 정여울/ 미디어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