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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도 성별도 옷차림도 벗어버리고 그냥 그루브하라!
김도훈 2004-03-11

<클럽문화의 발전을 위한 제언> : 홍대 클럽데이와 레이브 파티의 본고장 영국의 클럽 비교체험한장의 티켓만으로 대부분의 클럽을 마음껏 들락날락할 수 있다는 클럽데이의 철학은 그야말로 만국의 춤꾼들, 아니 마음껏 놀고 싶은 모든 ‘인류’를 위한 놀랍도록 평등한 아이디어다. 대체 이 철학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이미 서구의 일렉트로니카-클럽문화는 영화라는 매체의 영향력을 훌쩍 넘어서서 그 독특한 놀이문화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중이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도달한 서울, 홍익대 앞이라는 변방의 지형도에서 그것은 어떻게 홀로 진화해왔을까. 34회 클럽데이의 파티 현장으로 들어가보자.

편집자

“만약 니가 오늘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거야. 파티는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 마지막 레코드가 회전을 멈출 때까지는 말이지.” -영화 〈groove〉 중-

서울 홍익대 앞은 설레고 있었다. 한국의 어떠한 도시나 마찬가지이듯, 난잡한 간판들과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회색의 콘크리트 유리 결합체들이 좁게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그 골목들의 집합은 밤이 되면 ‘드랙’을 하기 시작한다. 스산한 바람과 잘못 선택되어지고 심어진 흉물스런 가로수가 둘러싼, 윗분들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걷고 싶은 거리’는 황량하기 그지없고 매주 마지막 금요일 밤 극동방송사 맞은편 주위의 골목 골목들 사이로만 비로소 거리는 살아나기 시작한다. 2월27일 제34회 클럽데이. 1만5천원짜리 티켓을 손에 쥐었다. 손목 주위에 걸어주는 티켓과(뜯어지면 무효라니 조심할 수밖에) 한장의 음료수 티켓. 이제 준비는 끝났다.11시가 갓 넘은 클럽들은 이미 온몸의 핏줄을 따라 할딱거리는 기계음으로 가득 차 있고 뿌연 연기와 클러버들의 몸으로부터 솟아나온 증기로 숨이 막힌다. 음료수를 하나 주문해서 손에 들고 거추장스러운 재킷을 벗어서 카운터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저 지금 옷 맡겨두실 자리가 없거든요” 하는 바텐더. 할 수 없이 바 옆에 쌓여 있는 맥주박스 위에 옷을 올려둔다. 분실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런 둔한 옷을 입고 클럽의 열기를 견뎌낼 수는 없다. 야광색 글루 스틱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뱅글뱅글 돌려대는 사람들, 두눈을 감고 흘러나오는 일렉트로니카 비트에 영혼을 맡긴 듯이 빠져 있는 사람들, 의자에 앉아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조용히 관전하는 사람들, 삼삼오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사람들. 그리고 열기들.

수입된 놀이로서의 클럽

“저 춤추고 계신데 죄송하지만 사진 한장만 찍어도 괜찮을까요?”

음악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 느닷없는 방해꾼의 요구에 슬그머니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면서도 사람들은 ’너 따위는 사실 안중에도 없어’라는 표정으로 다시 음악에 몰입하며 몸을 흔든다. 자정이 넘어가자 이미 클럽데이에 참가한 15개의 클럽들은 발디딜 틈도 없이 클러버들로 가득 차 있어서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한 클럽에서는 꽤 유명한 듯한 사회자가 무대에 나와서 이벤트를 진행 중이었다. 낯선 광경. 이런 것들이 바로 한국적 클럽문화라는 것을 외부의 것(혹은 오리지널)과 구분하는 요소들이 되는 것일까. 클럽의 입구들마다 가득 쌓여 있는 판촉행사 중인 담배들과 그 옆에 서서 피곤한 듯이 웃고 있는 담배회사 아가씨. 갑자기 음악이 꺼지고 홀연히 벌어지는 이벤트 시간, 금세까지 음악의 황홀경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대에 눈과 귀를 몰입하고 사회자의 말에 열심히, 착한 아이처럼 네! 하고 소리친다. 갑자기 뭔가 한없이 낯선 기분이 들었다.

PLUR? 무슨 뜻이야?

PLUR, Peace(평화), Love(사랑), Unity(화합) 그리고 Respect(존경)의 앞자들을 딴 거지.(엑스터시 타블렛을 삼키며) 좋아. 그렇다면 사랑을 위해! -영화 〈groove〉 중-

새벽 2, 3시가 넘어가도록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위해 클럽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클럽데이에 참가하는 모든 클럽들을 전전하며 놀아보려는 사람들도 있고, 물좋은나이트 고르듯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도 있다. 미군 출입금지 팻말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종이 혼재하는 홍익대의 거리들은 차가운 새벽의 냉기마저 털어내는 거대한 용광로 같은 열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서 머릿속을 공명해댄다. 왜 이 열기는 친철하고 즐겁게 모두 같이 타오르지 않고, 끼리끼리 모여서 타오르는 작은 열기들의 틈 사이로 여전히 서늘한 냉기를 느껴지게 만드는 것일까. 홍익대라는 공간이 적극적으로 수입해온 이 여전히 이질적인 놀이문화의 근원에는 여전히 평화, 사랑, 화합, 존경이라는 만세계 클러버들의 공통적인 모토가 자리잡고 있지 않았다는 말일까.

클럽들을 돌아다니다가 벽에 붙은 또 다른 파티의 광고를 보게 되었다. 3만원이 넘는 가격에 장소는 홍익대 앞이 아닌 강남의 한 클럽. 그러니까 꿈에 그리던 유명 DJ의 내한파티에 참가하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건 가벼운 옷차림으로 홍익대 앞의 조그마한 클럽에 들르는 일이 아니라 성수대교를 건너 홍익대와는 전혀 다른 코드를 지닌 강남의 커다란 자본의 궁전에 3만5천원을 주고 들어가는 시간과 돈이다. 드레스 코드 역시 광고에 등장. 잠시 아찔함을 느꼈다. 한국 물가의 서너배를 거뜬히 넘어가는 살인적인 물가의 런던, 그 중심가의 클럽에 입장할 수 있는 돈도 비싸봐야 3만원이다. 그러니 결국 나는 런던의 클럽에 들어가는 돈과 똑같은 입장료를 내야만 같은 DJ들의 음악에 취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같은 방식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싸구려 면티에도 당당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한 반자본주의적 놀이터인 ‘본토’의 클럽과는 달리 나는 폴 스미스를 걸친 아이들의 값비싼 팬시 드레스들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 것이다. 중간중간 진행되는 이벤트들이 지속되는 DJ의 턴테이블 주술을 탈색시켜버릴 것인데다가(아연실색하게도 ‘그냥 미치도록 춤만 추는 것이 아닌 다채로운 이벤트형 파티’라는 모토를 자랑스럽게 내건 강남의 클럽도 있었다) 모든 것은 마치 해운대, 유성온천, 강남역 전국 어디에나 혼재하는 부채들고 부킹하는 한국형 나이트클럽의 새로운 버전업으로도 보인다. 새로운 아이템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진해내는 젊고 싱싱한 육체의 값비싼 전시장으로서의 효용으로 가득 찬.

클럽문화의 모토는 PLUR!

레이브 파티(Rave Party)의 진원점은 영국이었다. 버려진 창고나 야외의 천막을 이용해서 밤새도록 음악을 틀어놓고 집단 트랜스 상태에 도달하는 일종의 공동체적 의식이었던 이 놀이문화의 일종은 당연한 수순으로 일렉트로니카 음악신을 흡수했다. 같은 비트를 몽환적으로 반복하는 일렉트로니카 음악은 레이브 파티에 가장 어울리는 종류의 주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영국의 레이브 컬처는 80년대 말 태동한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수많은 하위문화의 징후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그렇다, 클럽문화는 하위문화다. 레이버(ravers: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중심으로 레이브 파티를 즐기는 무리), 지피(zippies: 히피+레이버), 크러스티(crusties: 남루한 복장을 하고 도시 주위를 떠도는 생태주의적 배회자), 스쿼터(squatters: 빈집을 점유하고 생활하는 떠돌이) 등등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레이브 파티에서 보는 것은 지금도 영국에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클러버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클럽에서 모두가 원하는 것은 말 그대로 평화(Peace), 사랑(Love), 화합(Unity) 그리고 존경(Respect)의 모토들. 옷차림과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음악을 매개로 아무런 신분의 경계에 속박되지 않고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오래된 클럽문화의 진원지만이 지니고 있는 오리지널리티의 힘일까. 클럽문화를 엄청난 속도로 받아들이고 클럽데이라는 전무후무한 축제의 장까지 열어젖힌 홍익대의 클럽문화가 이같은 클럽 컬처의 진실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직도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창고(Warehouse)에서의 무료 레이브 파티를 주최하려는 두 친구

넌 왜 이런 짓을 하지? 한푼도 받지 않는데다가 구속될 위험도 높고.

너 정말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단 말이야?

몰라.

인사(nod).

인사?

내가 주최한 모든 파티에서 적어도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지. 그리고 말해. “정말 이런 파티 만들어줘서 고마워. 정말로 나한테는 이게 필요했거든.” 그리고 나한테 고개 숙여 가볍게 인사하지. 그러면 나도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해.

그게 다야?

응. 그게 다야. -영화 〈groove〉 중-

새벽 5시가 가까워진 홍익대의 거리. 여전히 클럽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고, 한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옷차림을 한 젊은이들이 시원한 새벽공기를 받으면서 길거리에 삼삼오오 모여 땀을 식히고 있다. 그들만이 향유하는 그들만의 코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복적이거나 대안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홍익대 클럽은 여전히 끼리끼리 모여서 자신을 전시할 수 있는 절묘한 목적을 지닌 장소임에 틀림없었다. 여전히 클러버 혹은 레이버라 지칭할 수 있는 무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클럽마다 다른 취향을 지닌 음악을 찾아서 돌아다니는 무리보다는 모든 클럽엘 잠시 잠시 들러 물을 보고 노는 무리들이 많아 보이기도 했다. 현재 홍익대 앞의 클럽문화는 기본적인 서구문화의 매개체에 머무르고 있고, 그 자신이 생산적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기에는 힘에 부쳐 보이기도 한다. 수많은 새로운 문화적 징후들과 경향들이 이 공간에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가버린다. 팬시한 여성잡지들은 저마다 홍익대 클러빙을 위한 옷차림 제안 같은 싸구려 기사들로 클럽 컬처를 바비 인형들의 사교터로 만들고 있고, 클러빙을 즐기려면 이러이러한 옷차림에 이러저러한 댄스동작을 취하라는 가이드가 나올 때도 멀지 않았다. 엑스터시 타블렛들이 손에 손에 쥐어져 입으로 입으로 삼켜지는 영국의 드럭·레이브 문화의 위험한(혹은 자유로운) 징후 대신에 우리가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팬시 드레스로 가득 찬 근사한 금요일 밤의 또 다른 유흥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홍익대 앞이 만들어내고 소진하는 것들을 강남은 자본으로 굳건히 지켜낼지도 모른다. 이처럼 무서운 예언이 있을까마는.

홍대 앞에 진보의 가능성은 있는가

유고 내전이 한창이었던 1999년의 베오그라드, 언제 어느 블록에 떨어져 거대한 묘지를 만들지도 모르는 나토 폭격기의 미사일과 폭탄에도 불구하고 유고의 젋은이들은 언더그라운드 클럽에 모여서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몸을 맡기고 클러버의 전쟁에 돌입했다. 밀로셰비치의 폭정에 항거하는 동시에 나토의 무차별적인 폭격에 시달리면서도 새롭게 발견한 음악의 힘에 도취된 그들은 조용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클럽에 모여 비밀스럽고 용감한 파티의 저항을 해나갔다. 2003년의 브리스톨 근교를 나는 기억한다. 일단의 젊은이들은 근교의 농장을 빌려서 3일 밤낮을 계속할 자그마한 그들만의 일렉트로니카 우드스탁을 계획하고 있었다. 일주일을 꼬박, 부모 클러버들을 위한 어린이 쉼터까지 완성한 그들에게 일단의 지역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그들의 파티는 그걸로 시작도 해보지 못한 채 끝이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했던 친구의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행복한 사람들이 행복한 음악에 취해 함께 즐기는 것을 정부와 경찰은 원하지 않아.” 그 모든 현재진행형의 시련들을 딛고 서구의 클럽-파티-일렉트로니카 문화는 발전해가고 있다. 주체는 참가자들이며 모든 것은 그들에 의해 새로이 시도되고 만들어지고 방어되어진다. 이 지점에서 볼 때 홍익대는 모든 것이 거꾸로 만들어진 참으로 괴상한 공간이다.

인위적으로 생산되고 이식되어진 홍익대 앞의 클럽문화는 (서구에서는 적극적으로 클럽문화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현하는) 공권력에 의해 오히려 문화상품으로 일정 부분 보장받고 있으며, 이는 여러 해 계속되어온 ‘엑스터시 파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하다. 여기서 홍익대 앞 클럽문화의 주체를 찾는 일은 여전히 아리송하다. 음악으로 시작되어 커뮤니티를 형성한 서구의 경우와는 달리 이곳의 지형도가 만들어진 그 생성과정은, 커뮤니티를 먼저 형성하고 음악을 후발적으로 이용자들에게 알리는 순서로 진행되어졌다. 하지만 이 모든 혼란스런 클럽문화의 기이한 진화방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새롭기 그지없는 놀이문화의 살아 있는 징후들을 포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폭발하듯 발전을 거듭해온 홍익대 앞 클럽문화의 열기는 놀이문화가 절대적으로 부재한(주말에 친구들과 만나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인구 1천만명이 다같이 관람한 ‘그’ 영화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권하는 ‘그’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유일한) 이곳의 아이들에게 그 풍부한 ‘놀이’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클럽데이가 어땠냐고? 가능성 절반, 그러나 무릎을 꿇을 가능성도 절반. 자신을 쿨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쿨한 애티튜드를 취하며 자기애에 빠진 어리석은 철새 클러버가 늘어나는 속도만큼 음악을 즐기고 그 PLUR의 정신, 공동체적 문화의 본질에 흠뻑 취해 120BPM의 비트에 심장박동을 맡기는 클러버들도 늘어난다면 진화의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그 진화의 전조들은 이미 34회째 클럽데이를 맞은 홍익대 앞 거리를 조심스레 기웃거리고 있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빛이 있으라” 그리고 심심해진 하나님은 “그루브(Groove)도 있으라” 하셨으니, 인종도 계급도 성별도 옷차림도 벗어버리고 그냥 그루브하라. 언제나처럼 그 철학은 단순하다.

글·사진 김도훈 closer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