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 <아들>을 보고 인간의 심리조작에 대해 생각하다
이런 여자를 상상해보자. 어린 시절을 강남에서 유복하게 보내고 명문 여대에 입학해서 지금 3학년에 재학 중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서 등록금을 낼 수 없는 것은 물론, 날마다 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채권자들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냥 옆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는 말에 학교를 그만두고 먼 친척이 운영하는 강남 룸살롱에 나가기 시작한다.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성모 마리아를 경배하며 성장한 그녀로서는 술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이었다. 게다가, 절대로 매춘은 안 한다는 노선을 정한지라 수입도 생각보다 신통찮았다. 그만둘까, 매춘을 할까, 그냥 참고 지내볼까 고민하던 차에 40대의 중년 남자가 제안을 한다. “하룻밤 자면 10억원 주겠다.” 그는 강남의 늙은 오렌지였는데, 그녀가 본 남자 중에 가장 재수가 없는 남자였다. 그녀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런 경우 가장 건전한 영화는 그 남자가 샤워하는 동안 문득 깨달은 바 있는 여자가 문을 박차고 뛰어 나올 때 매우 장중한 행진곡을 집어넣는다. 그 다음 건전한 영화는 하룻밤을 보낸 여자에게 가짜 수표를 준다. 그 다음 건전한 영화들은 돈을 받은 여자가 흥청망청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종류보다 조금 리얼한 영화는 여자가 돈을 갖고 랄랄라 떠나는 장면에서 막을 내릴 것이다. 그 다음 벌어지는 일은 오로지 여자의 평소 생활력에 달렸으니까. 그런데, 이 여자의 선택은 상투적인 영화적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녀는 하룻밤 생각하고 다음날 아무런 미련없이 결행했다. 그리고, 돈을 받아 챙겼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일주일 뒤 그녀는 그 남자를 찾아가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아니 어찌 이런 일이!
‘그녀’는 <카라마조프의 형제>에 나오는 한 여성 캐릭터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그녀의 행동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진단은 이렇다. 먼저, 그녀는 몸을 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의 정조보다 아버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더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결론내린다.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비도덕적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자신이 있다고 확신하면서. 그런데, 문제는 몸을 팔고 난 다음이다. 수단의 부도덕함이 목적의 정당성에 의해 극복될 거라고 믿었지만 그녀는 좀처럼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고민한 결과 수단의 부도덕함을 없애는 길은 그 행위를 매춘이 아니라 사랑의 결과로 바꾸는 것, 그리고 그걸 자신에게 확신시켜나가는 거라고 결론내린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 남자를 자신이 거두어야 할 불쌍한 존재로, 자신을 남루함에 사랑을 느끼는 헌신적인 성모로 조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이미지를 사건의 발생시점에 끌어들여 처음부터 매춘에 응한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고 자신을 설득한다. 이 여자는 인간 내면의 다양한 무늬를 펼쳐 보인다. 그중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인상 깊게 본 무늬는 ‘애착’이다. 이 여자의 고귀한 허영은 매춘을 하기 전 고결했던 자신에 대한 애착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복원에 대한 맹목적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거다(현대의 정신의학은 여기에 ‘고착’이라는 말을 적용해 개인의 고유한 역사를 부정하면서 표준화된 사회적 주체를 만드는 도구로 사용한다).
영화 <아들>을 보고 떠오른 단 하나의 단어가 애착이었다. 이 영화는 어린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자신의 학생으로 받은 직업학교 선생의 얘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는 과연 주인공이 아들의 살인범을 살해할까 말까 하는 호기심을 장치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결국, 그냥 내버려둔다는 게 결론인데, 살의를 접은 이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 같았다. 하나뿐인 아들이 살해당하고, 그 때문에 아내와 헤어지고 자기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졸지에 잃어버린 사람이 어느 날 제 발로 찾아온 원인 제공자를 용서한다? 나는 그게 아무래도 애착 때문인 것 같다. 잃어버린 게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살인범을 죽여 마음의 적의마저 없애버리면 삶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 그는 어떤 방식이든 그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 그는 거기에 오래 머물러 있기 위해서라도 ‘원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보면 애착은 육체가 정신에게 은밀히 건네는 선물이 아닌가.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