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처럼 날마다 닥치는 시련도 없다. <천국의 계단>처럼 엄청난 비밀도 없다.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오히려 주인공들의 감정은 좀 복잡하다. 그런데도 묘한 매력이 있다. 나만 끌리는 게 아니다. 시청률 30%를 웃돈다. SBS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 이야기다.
외양은 통속 드라마의 원단. 왕자님을 꿈꾸는 신데렐라 이야기다. 이수정(하지원)은 신데렐라답게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다. 혼자 힘으로 세파를 헤쳐왔으니 지고지순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속물 근성으로 똘똘 뭉쳐 있다. 아예 드라마 초반부에 “처음부터 다 가진 놈 하나 물어서 팔자 고치는 것이 꿈”이라고 커밍아웃한다. 그게 무슨 죄냐? 희망없는 인생의 유일한 탈출구인데. 우리처럼.
물론 신데렐라는 오매불망, 좌불안석 기다리던 왕자님을 만났다. 발리에서. 철부지 왕자, 정재민(조인성)은 여차저차해서 속물 신데렐라에게 끌린다. 짝짝짝, 해피엔딩? 오호 통재라. 하필이면 가난한 흑기사, 강인욱(소지섭)이 끼어들 게 뭐람. 당연히 사랑의 결투가 펼쳐진다. 발랑 까진 신데렐라, 두손에 떡을 들고 운다. 돈을 좇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택하자니 돈이 운다. 그 번뇌, 이해가 간다. 그리하여 지고지순하지 않은 신데렐라, 심금을 울린다. 영어로는 이런 걸 리얼리티라고 하지?
까진 신데렐라, 사는 꼴이 가관이다. 왕자가 휴대폰을 안기면 못 이기는 척 받는다. 혼자 남으면 실실 웃음을 흘린다. 그 휴대폰으로 흑기사의 콜을 기다린다. 휴대폰뿐이랴. 아르마니 코트도, 페라가모 구두도 땡큐다. 왕자가 건네는 아파트 열쇠도 덥석. 단, 선물공세는 오케이지만, 육탄공세는 노땡큐다. 흑기사한테는 입술을 주지만, 왕자의 입술은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왕자님 만나기 전에 꼭 화장은 고친다. 일찍이 조상들께서,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가? 복잡한 신데렐라, 온몸으로 증명한다.
캔디인 척하는 것도 짠하다. 왕자 엄마가 “기생충 같은 기집애”라며 귀싸대기를 후려쳐도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엄마의 갤러리에 꼬박꼬박 출근해서 속을 뒤집는다. 월급 100만원, 오직 돈 때문이다. 자존심 운운하며 출근을 말리는 흑기사의 충고를 울먹이며 되받는다. “기생충, 버러지, 쓰레기, 거지 깽깽이 그런 말이 뭐가 어때서요? 나 그런 말 9살 때부터 듣고 자랐어요.” 짠하다. 선현들께서는, 눈물이 아래로 흘러도 밥숟가락은 위로 올라간다는 명언을 남기셨다. 신데렐라의 눈물 젖은 밥숟가락이 그 진리를 증명한다.
왕자님과 흑기사는 질투의 화신이다. 그들의 슬로건은 ‘질투는 나의 힘’. 출신성분으로도, 과거전력으로도 숙명의 라이벌이다. 이미 1차대전도 치렀다. 왕자님의 약혼녀 최영주(박예진)가 흑기사의 옛 애인. 불쌍한 왕자, 흑기사에게 약혼녀의 마음을 빼앗기고, 신데렐라까지 빼앗기게 생겼다. 어찌 질투에 눈이 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자님은 신데렐라를 가지고 싶어할수록 흑기사를 질투할 수밖에 없고, 흑기사도 신데렐라를 사랑할수록 왕자님을 시기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둘은 직장 상사와 부하 사이. 하루하루가 지옥일 수밖에. 오죽하면 그 과묵한 흑기사가 “니가 정재민이랑 있는 걸 보면 못 견디겠어”라는 직설화법까지 썼겠는가? 쿨한 왕자님께서 “강인욱이랑 가지마!”라고 절규했겠는가?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의 어법을 빌리면, “신데렐라, 흑기사(혹은 왕자)랑 자지마요. 나도 잘해요”. 요컨대 <발리에서 생긴 일>은 그놈이 그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악몽의 드라마다. 우리 꿈의 레알리슴.
더욱 적나라한 것은, 모든 사랑의 결투가 무승부라는 사실. 이 드라마의 누구도 사랑을 완전 정복하지 못한다. 신데렐라는 흑기사의 순정을 사랑하지만, 왕자님의 다이아반지도 갖고 싶다. 공주님은 흑기사를 사랑했지만, 왕자님도 놓칠 수 없다. 왕자님과 흑기사의 심사도 복잡하긴 마찬가지. 흑기사가 정말 그 옛날 공주님을 사랑했었는지도 모호하다. 왕자님이 신데렐라에게 처음 관심을 두게 된 이유가 흑기사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는지도 애매하다. 하여튼, 얘는 이래서 좋고, 쟤는 저래서 좋은데, 어쩌라고? 그게 현실 아니던가. 때묻은 세상에서 때묻지 않는 사랑? 설마. 콩글리시로 리얼리티 만빵!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그람시를 아는가? 그러면 헤게모니는? 모른다면 이 드라마를 보기를. 신데렐라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그놈들의 헤게모니”에서 빠져나오는 결말을 목격할지도 모르니까. 그것이 곧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일 테니까. 혹시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면 신데렐라처럼 침 흘려가며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일독하기를. 흑기사의 충고대로 세 페이지만 읽어도 잠이 잘 올 테니까.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s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