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실패한 아버지의 역사를 보다
격동기의 남자들은 집을 비운다. 여자들은 숨을 죽이고 일만 한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풀꽃처럼 자란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언덕 너머의 풍문이고 잠결에 잠시 스쳐가는 바람이다. 한국의 근대는 줄곧 그랬다.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국가라는 아버지는 사라졌다. 상하이로 거처를 옮겨갔다는 풍문만 들려올 뿐이었다. 각 가정의 아버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독립운동하러 만주로, 돈벌러 일본으로, 황군의 징집영장을 받고 남태평양으로 떠났다. 남은 아버지들은 일제라는 대부(代父)에 아부하여 친일파가 되거나, 고문당해 병신이 되거나, 절망하여 아편쟁이가 됐다. 태극기 휘날리며 돌아오겠다던 아버지의 자리는 36년 동안 그렇게 비어 있었다.
해방이 되어 상하이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또 다른 대부의 자식인 의붓아버지에 의해 밀려났다. 1950년에는 의붓아버지들의 세력 다툼에 다시 각 가정의 아버지들이 남으로 북으로 흩어졌다. 의붓자식들끼리의 싸움은 피로 이 땅을 적셨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의붓아버지는 건재하고, 태극기 휘날리면 돌아오겠다던 아버지들은 다시 병신이 되거나 유골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다. 1961년에 이르러, 더이상 아비 없는 자식들을 눈뜨고 볼 수 없다며, 의붓아버지의 경호원 한명이 ‘진짜 사나이’, 아니 ‘진짜 아버지’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는 의붓아버지를 총으로 몰아내고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의 아버지, 조국(祖國)이 되겠다고 공언했다. 이 할아버지는 부족장답게 자상도 하여, 손자들의 정신교육을 위해 국민교육헌장을 짓고, 육체적 건강을 염려해 조기청소를 실시했다. 아버지들을 위해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작업장 분위기를 가족처럼 만들어 노동자들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일만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탕진할까 염려해 지금은 쥐꼬리만큼이지만 나중에 소대가리만큼 돌려주겠다는 ‘선성장 후분배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 말을 믿고 아버지들은 다시 중동으로 아프리카로 야간 잔업 현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장동건은 그렇게 아버지가 비운 자리를 채운 맏형이다. 어머니에게는 애인이고 동생들에게는 아버지인 소년 가장. 아버지가 아니면서 아버지의 관념을 강박으로 지고 있기 때문에 더 아버지답고 더 아버지스러워야 하는 인물. 이 캐릭터는 아버지 없이 성장해서 소년의 육체로 아버지의 관념을 지고 살았던 한국 근대사의 모든 아버지들의 원형이다. 무력한 낙오자가 될까 하는 거세 공포 때문에 차라리 경직된 억압자의 길을 선택하는, 그리하여 결국은 아버지되기에 실패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는 가족의 억압자이고, 역사의 희생자이다. 또 과거의 상흔이면서 현재의 집단적 욕망이기도 한다. 2004년의 자식은 그 애증의 협곡에 갇혀 있다. 부재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나이 들어 자기 안에서 아버지의 역사를 발견하는 순간 죄의식과 그리움으로 화한다.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 아버지는 실패했고 패자에 대한 그리움은 나의 성공을 위협한다는 거세공포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식은 안다. 아버지의 역사가 곧바로 자신의 역사임을. 아무리 성공의 포즈를 취해도 결코 성공한 아버지가 될 수 없음을, 언제나 아버지를 기다리는 허기진 자식임을. 그리하여 마침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자기 연민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한국의 집단적 감정 구조를 호명하는 코드는 형제애다. ‘형’은 실패한 아버지를 공적으로 부정하면서 사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일종의 복화술이다. ‘형’은 부재했던 아버지가 결핍했던 것, 늘 가까이 있는 수평적 자상함을 가진 억압자이자 희생자로서의 아버지이다. 아파트 평수와 자식의 학벌과 높은 자리를 위해 여전히 집을 비우는 아버지는 소년의 육체로 아버지되기의 고단함 때문에 ‘형’을 호명한다. 아버지 없이, 아버지라는 관념 속에서 자란, 그 자식도 나중에 아버지를 부정하면서 형을 찾을까? 관객 천만명을 목표로 한 블록버스터가 조준한 상업적 탄착점이 이거라면 실패한 아버지의 역사는 여전히 우리 안에서 현재진행형이란 얘기일지도 모른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