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에서 잭 니콜슨이 연기한 주인공 잭은 글을 쓰는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할말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것에 대해서 프레드릭 제임슨은 잭과 그가 속한 가족이 적나라한 소외 상태에 놓여 있으며 서로에 대한 관계가 발전할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어서 제임슨은 ‘서로가 잘 알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선망이야말로 <샤이닝>이라는 영화의 궁극적인 주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영화는 과거의 어떤 시대로 시선을 향하고 있다. 이제 제임슨이 쓴 이 글의 제목이 왜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는 “<샤이닝>과 역사주의”인지, 왜 그가 <샤이닝>을 두고 역사의 위협을 다루는 역사적 논평이라고 불렀는지 개략적이나마 어느 정도 이해의 실마리가 주어졌으리라 본다.
물론 앞에서 인용한 내용은 <보이는 것의 날인>이라는 제임슨의 책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샤이닝>에 대한 그의 글에 대해서도 일부만을 가져온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여하튼 여기에서 현존하는 미국의 으뜸가는 마르크시스트 비평가라는 제임슨이 영화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지 그 구체적인 실례는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 제임슨이 보기에 대중문화란, 그리고 영화란 당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사회 불안과 우려, 희망과 쟁점, 이데올로기적 이율 배반과 피해가 막심한 판타지 등”을 기본 원료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혹은 그것을 포괄하는 시각문화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역사적 맥락 안에 그 대상을 집어넣고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임슨은 말한다. 그의 말을 직접 빌리자면, “시각적인 것을 사고하는 유일한 방법, 즉 점점 더 많아지고 편향되고 있으며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시각적인 것을 다루는 유일한 길은 이러한 현상이 역사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과정을 파악하는 것이라는 명제”, 바로 그것이야말로 제임슨의 비평적 글쓰기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태도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보이는 것의 날인>에는 영화미학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문제, 시드니 루멧의 <뜨거운 오후>, 장 자크 베넥스의 <디바>,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크의 문화혁명, 앨프리드 히치콕과 그의 영화 등을 다룬 글들이 묶여 있다. 이 모두가 영화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는 분명 흥미진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일 테지만 저자의 박식함과 그 특유의 긴 문장들 때문에 쉽게 읽어가기는 힘든 면이 있다. 꽉 찬 글을 읽어갈 때의 즐거운 난관 정도로 이해하자.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 남인영 옮김 | 한나래 펴냄]홍성남/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