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여성만화(순정만화라 불리기도 하는)에 빠져들게 한 만화는 이케다 리요코의 <올훼스의 창>이었다. 순진한 전학생과 베일에 쌓인 주인공, 작품의 배경이 되는 볼셰비키 혁명. 아름다운 그림과 정서의 선을 타고 넘나드는 이야기 전개, 무엇보다 꽉 짜여진 그 스케일이 나를 매혹시켰다. 황미나, 김진, 김혜린, 신일숙, 강경옥, 80년대에 데뷔해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나가는 작가의 선 굵은 작품은 모두 긴 호흡을 지니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내면의 깊은 정서까지 파고드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반면, 90년대 후반 만화잡지가 점점 저연령층을 겨냥해 편집되면서 등장한 여러 작품들은 작가의 반짝이는 재치와 재능으로 인기를 얻었다. 애드리브가 서사를 구축한 것이다.
따지자면, <언플러그드보이>와 <오디션>의 성공으로 흥행작가가 된 천계영의 작품들도 대부분 ‘선 굵은, 긴 호흡’과 같은 수식어의 정반대 방향에 위치해 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새롭게 출간된 복귀작 는 이전 작품들보다 그 방향이 더욱 반대로 나가 있다. 등장인물들은 작가의 머릿속에서만 살고 있는 것과 같은 특이한 개성의 주인공들이다. 현실성은 없지만 우선 무언가 감추어진 재능이 있어 보이는 이들은 흥미롭다.
이야기의 전개도 사소한 에피소드를 증폭시켜 인연을 만든다. 어찌어찌해 만난 땀, 비누, 디디라는 인물이 동거에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1권의 전부다. 맞다. 겨우 1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고의 흥행보증수표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천계영의 작품이 오직 가볍게만, 감각으로만, 우연으로만, 기가 막힌 설정으로만 전개된다는 점에서 큰 불만이다. 한국 만화의 인기를 견인하는 간판작가라면 한번 더 이야기를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가벼운 트렌드가 과연 한국 만화를 독자들에게 더 많이 읽히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까? 아마 그 답은 작가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