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매체의 새로운 탄생
짐 호버먼/영화평론가·<빌리지 보이스>
“일단 나를 놀라게 해 보시오”라고 디아길레프(역주: 19세기말, 20세기 초에 활약한 러시아의 발레 연출가이자 무대 미술가)가 쟝 콕또에게 주문한 바 있듯이, ‘경이로움’은 모든 새로운 예술에 있어 하나의 금과옥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아타나주와>는 경이로움, 그 이상을 보여 준다. 에스키모어로 쓰여진 “최고(最古)”의 서사 문헌을 토대로 만들어진 “최초(最初)”의 에스키모어 장편극영화 <아타나주와>는 관객들에게 마치 백야의 하늘 아래에서 몇 일을 보낸 듯 한 기적과도 같은 ‘착각’, 혹은 ‘확인’의 경험을 선사한다.
북극권에서도 백 여 마일 이상 떨어진 캐나다의 최북단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된 영화 <아타나주아>는 원숙한 대가의 풍성한 성량(聲量)으로 11세기 에스키모족 내부의 반목과 갈등의 드라마를 더 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신비롭게, 또한 강렬하면서도 관능적으로 펼쳐 보인다. 삼 년여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 진 세 시간에 가까운 본 작품은 영화의 첫 장면부터 그 마지막 이미지까지 시종일관 관객을 무아지경으로 몰아 넣는다.
지난 20년 동안 에스키모족에 대한, 그리고 그들을 위한 비디오 다큐멘타리물을 만들어 온 44세의 제카리스 쿠눅 감독은 때론 미니멀리스트적인 묘사를 통해, 때론 보다 교묘하고 복잡한 방식을 통해 현재의 에스키모들이 잃어버린 자신들의 전통을 재구성해 나가는 문화적 부활의 드라마를 그려 왔다. 영화 매체의 초창기에 이미 로버트 플레허티나 에드워드 커티스 등이 에스키모 원주민을 등장시킨 재연(再演) 다큐멘타리를 만든 바 있고, 솔 워드가 만든 나바호 인디언에 관한 영화나 테벳 유목민들의 삶에 대한 가히 추상화적 경배라고 할 테엔쥬앙쥬앙 감독의 <도마적> 등을 최근의 선구적 시도들로 언급할 수 있겠지만, 이들 중 그 어느 작품도 <아타나주아> 만큼의 치열한 진정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아타나주아>에는 단순히 이글루 안에서 만들어 졌다는 사실 이상의 이국적 강렬함이 서려 있는 것이다.
일견 <아타나주아>는 그리스 비극이나 주간 TV 프로그램들의 익숙한 구성(사랑, 욕망, 섹스, 배반, 강간, 질투, 유혹, 살인, 근친 살해, 복수, 엑소시즘, 정신적 교감 그리고 운명 등)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하나의 에스키모 무리에 한정된 상황 하에서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또한 극단적으로 특이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최초에 부족에게 저주가 내리는 간결한 도입 장면 역시 그 속의 디테일들(여인들 얼굴의 고양이 문신, 흐느적거리는 기름 램프, 눈의 묘한 질감, 눈썰매 개들의 역할, 화려한 의상, 야한 장식들, 특이한 음식들)이 워낙 현란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매우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경고! 채식주의자들은 주의 할 것! 영화 속에는 가히 <서바이버> 시리즈의 북극편이라고 할 만큼 빈번한 날고기 섭취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가장 간명하게 정리를 하자면, <아타나주아>의 줄거리는 개인주의의 위협에 대한 훈계적이면서도 적당히 초자연적인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플롯은 아름다운 아투아트를 동시에 사랑하는 아타나주아와 오키, 두 사촌 간의 성적인 긴장 관계에 중심을 두고 있는데, 예상외로 아타나주아가 승리하지만 그가 오키의 불손한 여동생 파야를 자신의 두번째 아내로 맞이하면서 가족 관계는 더욱 복잡하게 얽힌다. 영화 속의 연기는 자연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과장되어 있는데 이 미묘한 조합을 통해 각각의 캐릭터는 생동감 있게 제시되고 있다. 아타나주아(나타 운갈라크, 그는 영화 속의 주요 케스팅 중 유일한 전문 배우이다)는 냉소적인 오키(아마도 악령에 사로잡힌 듯인 듯 한)보다도 호감 있게 카메라에 포착되고, 경박한 푸야는 얌전한 아투아트의 캐릭터를 부각시키는데 일조 한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은 에스키모의 아이들이 어떤 징조에 맞춰 이름지어지고 이후에 그러한 징조를 몸소 실현하게 된다고 설명하는데, 바로 이러한 믿음이 영화 속의 연기 스타일을 규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극중의 인물이 과거 조상의 페르소나를 되살려 낸다는 것이다. 때때로 카메라를 향해 웃음지으며 (아니면 추위 때문에 찡그리는 것일까?) 배우들은 즐거움과 결연함을 함께 표현하는데, 실제로 작품 전체가 무한정 이어지는 의식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서 카메라는 개들과 나란히 달리기도 하고 난투극을 벌이는 배우들을 향해 부딪힐 듯이 달려들기도 하는데, 영화의 잊을 수 없는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아타나주아는 무너진 천막에서 뛰쳐나와 벌거벗은 채 맨발로 끝없는 설원을 가로질러 달리고 카메라는 세 명의 살인자들과 함께 그의 발뒤꿈치를 부딪힐 듯 뒤쫓는다.
쿠눅 감독과 작가 폴 아팍 앵겔리크, 그리고 뉴욕 출신의 촬영감독 노만 콘이 모두 극영화 작업을 시작하기 훨씬 전에 비디오 아트 분야에 종사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끊임없이 관찰자적인 자세를 견지하지만 영화 <아타나주아>는 그 스타일리쉬한 영상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경과를 표현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 영화 <아타나주아>의 주안점은 “무엇이 지금 여기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영원한 현재와도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한없이 이어지는 하얀 광선의 외경과 오랜지 색감으로 물든 이글루 내부에 이르기까지 영화 <아타나주아>에서는 각각의 장소 자체가 하나의 특수효과인 셈이다. (인간의 육신이 이 저 극지의 환경에 적응해 온 과정을 잠시 숙고해 본다면, 당신은 과연 쿠눅 감독과 그의 동료들이 어떻게 이 영화를 완성해 냈는지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극지의 광선이 전해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흥과 단순한 연기를 넘어 선 모종의 의식으로서의 연기를 지켜볼 때, 영화 <아타나주아>는 가히 하나의 기적으로 다가온다. 영화 속에 조합된 장면들 중 얼마나 많은 장면들이 실제로는 하나의 테이크로 이루어 진 것일까? (성룡의 영화들은 앤딩 크레딧과 함께 실제 제작 과정 의 모습들을 감질나게 보여주곤 한다.) 에릭 로메르의 근작 나 어니 걸의 와는 달리 (스타워즈 시리즈는 여기서 논외로 하자) 디지털 카메라나 최근의 DV 제작시스템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아타나주아>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타나주아>는 디지털이라는 매체가 영화적 전위주자들을 위한 무기임을 확실히 각인시켜준다.
영화 리뷰 속의 미사여구들은 영화의 가치를 절하시키기 마련. 과연 <스파이더 맨>이 미국 문화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으며 <스타워즈:클론의 공격>이 미국 대중 문화의 순환적인 부흥을 예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 <아타나주아>는 지극히 원초적인 내용과 그 보편적인 드라마를 통해 영화 매체의 새로운 탄생을 선포하고 있다. 번역 권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