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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특별기고 [1] - SF호러영화의 괴물은 우리 자신이다
2004-02-05

“사드와 함께 칸트를!” 이 라캉의 공식을 능수능란하게 유용하는 스타 이론가 슬라보예 지젝, 그가 난해하지만 귀한 글 한편을 <씨네21>로 보내왔다. 그는 이 글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액션영화 <딥 임팩트>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영화 <솔라리스>에 이르기까지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텍스트들을 ‘실제적 사물’의 출현 방식을 따라 관통해 나아가면서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라캉을!’이라고 외친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입문해보자. 자, 흥미진진한 기대로 지젝과 함께 영화를!

(이 글은 영어로 쓰여졌으며, 저자 자신이 붙인 The Thing from the Inner Space라는 제목 이외의 부제와 중제는 <씨네21> 편집부에서 작성한 것이다.)

편집자

슬라보예 지젝 I 문화이론가

우리 자신의 일부로서의 사물 -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존재하는가?

자크 라캉은 ‘정신분석의 윤리’라는 세미나(1959∼60)를 진행하며 예술이란 언제나 불가능한, 즉 실제의 사물이 만들어내는 중심적 공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 진술은 아마도 릴케의 ‘미(美)란 두려운 것을 가리는 최후의 베일이다’라는 오랜 명제에 대한 변주로 읽혀야 할 것이다. 라캉은 이 공백의 주변이 시각예술과 건축에 있어 어떠한 기능을 하는지 암시한다. 여기서 (영화적 예술 역시 포함하는) 시각장(場), 재현의 장이 중심적이면서도 구조적인 공백과 그 공백에 고착되어 있는 불가능성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는지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리하여 결국 영화이론에서 봉합이라는 개념으로 부를 만한 부분을 설명하려는 것 또한 아니다). 나는 좀더 나이브하면서 비약적인 무언가를 하려 한다. 즉 실제적 사물이 영화 내러티브의 디제시스 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방식을, 좀더 짧게 말하자면 그 내러티브가 SF호러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외계의 사물들과 같이 불가능한/외상적 사물에 대해 다루고 있는 영화에 대해 말하겠다는 것이다.

<스타워즈>의 첫 번째 신이 이러한 사물이 내부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처음에 보이는 것은 한없이 어두운 하늘, 불길할 정도로 고요한 우주의 심연이다. 그 우주에 흩뜨러져 빛나는 별들은 물질적인 대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점들이고, 조화로운 우주를 보여주는 표식이며, 가상적 대상일 뿐이다. 그러던 중, 돌연 돌비 서라운드 음향에 따라 우리의 뒤에서, 우리의 가장 깊숙한 내면으로부터 진동이 들려오고, 잠시 뒤 타이태닉호의 우주 버전이라고 할 만한 거대한 우주선이 의기양양하게 스크린 안으로 등장하여 그 진동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 밝혀진다. 이렇게 대상으로서의 사물은 우리가 리얼리티로 쫓아내는 우리 자신의 일부분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거대한 대상이 침입해 들어오는 것은 우주의 한없는 공백을 바라보는 두려운 공허를 피해 어떤 안도감을 가져다주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침입이 그와는 정반대의 효과가 있다면 어떻겠는가? 진정한 공포란 우리가 그 무엇도 바랄 수 없는 어떤 과잉되고, 거대한 실제의 침입과도 같은 것에 대한 공포라면 어떻겠는가? ‘무(無) 대신 (실제의 얼룩과도 같은)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은 아마도 ‘어째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의 근원에 위치한 경험일 것이다.

‘외계의 물체’, 또는 ‘괴물’로 찾아오다

실제적 사물을 설명하는 예를 보자면 (존 카펜터의) <괴물>로부터 좀더 최근의 영화인 (빌 어거스트의) <센스 오브 스노우>에서와 같이, 우주로부터 떨어져 내려온 비밀스럽고 유령 같은 외계의 물체, 즉 인간적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고, 간혹 그 스스로의 악의를 품기도 하는 외계의 물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윤리학>에서 라캉이 실제적 사물의 예로 마르크스 형제 중 과묵한 하포 마르크스를 들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재치있는 천재인지, 완전한 바보인지 확신할 수 없는 괴물과도 같은 그는 어린애같이 순수하고, 친절한 면과 극단적인 타락, 성적 붕괴가 한데 겹쳐져 어느 쪽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그는 에덴으로부터의 추방 이전의 순결함을 상징하는가, 선과 악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완전한 자기중심주의를 상징하는가? 그는 이러한 절대적인 비결정성, 혹은 그보다 통약 불가능성이라 해도 좋을 특성 때문에 괴물스러운 사물, 실제적 사물로서의 타자가 된다. 즉, 상호주체적인 파트너가 아니라 철저히 비인간적인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이미 밝혀진 것처럼, 이 세명의 마르크스 형제는 프로이트가 자아(치코), 초자아(구루초), 이드(하포)로 나눈 삼각형과 완벽히 들어맞는다).

이 실제적 사물은 <킹콩>으로부터 <모비딕>을 거쳐, <모비딕>의 새로운 버전임에 분명한 J. 리 톰슨의 <하얀 물소>(The White Buffalo)에 이르는 과정에서처럼 괴물스러운 동물이 될 수도 있다. <하얀 물소>에서 주인공 빌 히콕은 그가 꿈에 보았던 (성스러운, 미국의 토착 동물이기도 한) 하얀 물소에 이끌려 서부로 돌아온다. 영화의 전체는 좁은 산길에서 하얀 물소가 주인공을 공격하고, 주인공이 결국 그 물소를 죽이는 마지막 대결신을 준비하고 상연하는 데 집중한다. 중요한 점은 찰스 브론슨이 자신의 눈먼 응시와 성적 무능함, 다시 말해 거세를 나타내는 기호로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찰스 브론슨은 그의 옛 애인인 포커 제니를 만나지만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없으며, 그녀와 섹스를 하지 못한다. 영화의 이러한 부분에서 찰스 브론슨의 성적 무능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기초적인 단계에서의 프로이트식 해석을 제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즉 하얀 물소는 아직 죽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의 성적 능력을 가로막고 있는 원시의 아버지라고 볼 수 있다. 그 물소가 내는 절망적인 소리는 유대교에서 양각호(羊角號)가 내는 소리와 동질적이다. 따라서 주인공이 무대에 올리고자 하는 장면은 부친살해의 장면이다.)

그러나 더욱 중대한 지점들이 존재한다. 실제적 사물(하얀 물소)은 성적 무능의 모티브뿐만 아니라 미국 자본주의의 파괴적 특성과도 연결된다. 히콕이 마지막으로 기차역에 도착할 때, 그는 수천 마리 물소들이 도살되어 산과 같이 쌓인 하얀 뼈들을 보게 된다(또한 역사로부터 알 수 있듯이, 그는 그러한 대량살상에 커다란 책임이 있다). 그렇게 때문에 하얀 물소는 모든 죽은 물소들의 원혼을 싣고 있는 유령이기도 한 것이다(히콕은 인디언 살인자로도 제시된다. 영화에서 주인공처럼 물소를 쫓고 있는 인디언 전사와 친구가 되는 것은 서부지역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봉사했던 그의 잔악한 과거와 타협하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 문화이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