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뚜껑을 열고 본 <그녀를 모르면 간첩>의 노선은 명백한 판타지다.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그리고 말장난처럼 얼짱 그녀가 ‘진짜’ 간첩이라는 황당무계한 설정이 기둥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점에 위장취업한 미모의 남파간첩 림계순은 온 동네 남학생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삼수생 최고봉이 얼짱 게시판에 올린 사진 때문에 유명세를 치르게 된 계순은 사진 삭제 요구를 위해 고봉을 만나고, 예기치 않은 감정의 동요를 느낀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계승한 듯한 ‘엽기녀 + 순진남’ 공식에, <간첩 리철진>을 연상시키는 남파간첩의 남한생활 적응기와 연애사건이 펼쳐지지만, <그녀를 모르면 간첩>은 새털 같은 가벼움과 명랑함을 지향한다. 계순이 서바이벌 게임에서 특급 공작원답게 맹활약을 벌인다거나, 선배 간첩이 공작금을 불리기 위해 피라미드에 빠져든다거나 하는 귀여운 에피소드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어느 삼수생의 한여름밤의 꿈 혹은 낭만적인 판타지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과 가상의 영역을 넘나드는 벤치마킹으로 다잡은 엽기발랄한 설정에서 더 나아가거나 깊어지지 않고 제대로 수습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여자가 '간첩'이라는 설정에서 파생된 시추에이션코미디는 결정적으로 로맨스의 진정성을 훼손한다. 끝내 그 정체를 모른 채로 '사랑한다'라고 믿는 고봉, 그의 진심에 흔들리기 시작하는 계순, 이들이 서로를 정색하며 마주 보는 순간이 이 영화에서 가장 어색한 순간이 되어버리고 만다.
어쩌면 <그녀를 모르면 간첩>은 어느 삼수생의 한여름밤의 꿈 또는 낭만적인 판타지다. 그러나 판타지에도, 기획상품에도 깊이와 울림은 필요하다. 그럴싸한 이미지와 구호만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 아쉽다고 한다면, 너무 쉰내 나는 고백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