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린은 무엇보다 이야기의 작가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복판에 사람이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아주 상식적인 창작의 원칙을 충실하게 지킨다. <그대를 위한 방문자>는 지금 보면 다소 낯선 연출법들이 등장한다. 내적 자아와 대화, 갈등하는 예술가의 모습, 과도한 독백과 내레이션까지. 하지만 이 작품은 솔직한 그대로 80년대를 살아가는 작가가 경험해야 하는 갈등의 크기다. 낯설지만 사랑스러운 단편이다.
<우리들의 성모님> 역시 80년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광산, 도피수배자, 시골 술집여자, 농촌문제 등 매우 복잡한 모순과 갈등이 중첩되어 있지만, 보살처럼 보이는 난주의 모습 하나로 작가의 메시지를 확연하게 전달한다.
1995년작인 <샤만의 바위>와 1996년작인 <로프누르-잃어버린 호수>는 <불의 검>을 통해 관심을 갖게 된 고대 동아시아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실 <불의 검>이 보여주는 여러 인물의 구도 중 독자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주인공은 붉은 꽃 바리가 아닐까. 두 단편에서 모두 바리의 슬픈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남은 작품은 <히스꽃 필 때에는…>과 <붉은 돌의 왕자> <아만테스> 〈XX〉가 있다. 서양을 배경으로 한 작품,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 환생과 캄보디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 SF, 여성성의 연대를 다룬 작품으로 소재와 주제, 연출의 방법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이들 작품 모두에서 20여년 동안 성실하게 만화에 임해온 작가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두툼하게 잘 만들어진 책의 모양새도 만점.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