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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사무라이>는 어떻게 사무라이를 영웅으로 만들었나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영웅의 행위를 완성하려는 <라스트 사무라이>를 ‘서사시적’이라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인디언 척벌 현장의 선두에 서서 야만스런 서부 개척사를 써내려간 네이든 알그렌 대위는 근대화에 직면한 일본의 역사로 들어와 사무라이 세계에 빠져드는 전환의 궤적을 그려낸다. 그는 지리적 좌표를 옮김으로써 마음의 거처를 새로 정하고, 비극적 서사시의 영웅을 자처한다. 영화 속에서 알그렌이 빠져든 것은 사무라이의 정신이며, 그 정신에 대한 매혹의 주종관계를 만들어낸 실제 주인은 감독 에드워드 즈윅이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한다. 에드워드 즈윅은 사무라이를 오로지 기호의 열도, 할복의 대지에 살고 있는 아름다운 형상으로‘만’ 기억한다. 그 형상에 대한 매혹을 충족하기 위해 역사는 ‘반복’되고 행위는 ‘전복’된다. 인디언 학살에 동참했던 알그렌 대위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단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의 황실 군대를 맡아 신식 총기교육을 시키던 그는 포로가 되어 동생하게 된 사무라이들의 세계에 오히려 감복하고 만다. 이제 그가 지키고자 애쓰는 것은 소멸의 상태에 몰린 사무라이들의 터다. 매혹은 드디어 번제의 행위를 떠맡는다. 영화는 인디언 학살과 사무라이의 소멸을 같은 상황으로 상정한다. 그들은 역사의 반복 속에서 같은 수준의 피해자가 된다. 하지만 주인공 알그렌이 서 있는 위치와 행위는 처음과 그 반대이다. 인디언에 대한 속죄의 마음은 알그렌의 자기 번제행위를 통해 깨끗해지려 할 찰나에 놓인다. 알그렌은 ‘작은 거인’이 되어 ‘사무라이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다. 서부가 아니라 일본에서. 이 지점에서 <라스트 사무라이>의 ‘결백의 수사학’이 작동한다.

<파우스트>에서 <백년의 고독>까지 종횡무진 근대의 서사시를 읽어내려가는 프랑코 모레티는 과거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사악한 무엇에게 전가하고, 부정과 거부를 통해 폭력을 외부투사함으로써 결백의 수사학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정확히 그 반대이다. 그 책임을 속죄의 마음을 빌려 떠안고, 인정과 참회를 통해 폭력의 내적 주인임을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결백을 주장한다. 대신 이런 악조건을 만든 건 돌이킬 수 없는, 또는 악마 같은 역사 그 자체라고 떠민다. 오로지 사무라이가 되는 것만이 결백한 영웅이 되는 길이라고 암시한다. 하지만 사무라이는 영웅이 될 수 없다. 다르게 말해 알그렌이 진정한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전사해야 옳았을 것이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들이 왜 소멸해야만 하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단지 마지막 절벽에 힘주어 버티고 선 장렬한 발뒤꿈치에만 관심을 보인다. 오히려 사라졌기 때문에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감독 에드워드 즈윅이 이 영화의 원형적 단상이라고 고백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들은 영웅인 적이 없다. 그들은 차라리 쓸쓸하게(‘장렬하게’가 아니라) 밀려나고 버려진 ‘계급’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역시 사무라이와 그들의 액션-이미지에 빠졌던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구로사와는 언제나 그 점을 두고 선택을 한다. <라스트 사무라이>의 마지막 전투장면은 <카게무샤>(주군과 비슷하여 때때로 그의 역할을 대신하는 그림자 무사)의 마지막 전투를 원본으로 두었을 것이다. 피로 넘치는 전장과 쓰러져 나뒹구는 병사와 말들. 하지만, <카게무샤>의 그 장면에는 ‘전장’만 있을 뿐, ‘전투’가 없다. 구로사와는 전투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반응 숏만으로 그 장면을 만들었다. 마침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처참하게 이미 벌어진 패전의 잔해들뿐이다. 그는 장대한 전투의 재현이 가져올 스펙터클 효과가 이 영화의 마지막이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한 셈이다. ‘구식’ 기마대로 무장한 다케다 신겐의 부대가 ‘신식’ 조총으로 대응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대에 참패하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역사의 잔혹함을 이 장면에 담으려 했던 것이다. 에드워드 즈윅에게는 이런 망각도 있다. 농민들을 도적떼의 침입에서 구해낸 , 전투를 끝내고 농민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대장은 말한다. “우리는 또다시 패배한 거야. 승리자는 저들 농민이지, 우리가 아니야.” 에드워드 즈윅이 몇십번을 보았다는 , 그 영화의 사무라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는 패잔병들의 모습으로 남는다. 구로사와는 그걸 인정한다.

<라스트 사무라이>가 애교섞인 패러디나 코미디를 지향한 소품이었다면 논점은 달라졌을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에드워드 즈윅이 이 영화를 솔직하게 전쟁영화라고 말하지 않고, 사무라이에 관한 영화라고 말함으로써 생겨난 문제이다. 이 영화는 전투장면에 힘을 쓰고, 영웅의 길에 목숨을 건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비동시성의 시대가 도래한 그 순간, 그래서 들끓는 변화의 양상 자체가 ‘격동’이라는 말 이외에 설명할 길 없는 그 순간, 기모노와 양복과 검과 총이 과거와 현재의 이름으로 뒤섞이는 혼잡한 식민적 소란 속에서 역사 대신, 스펙터클과 영웅을 본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그렇게 매혹이 번제를 낳고, 그 번제의 행위가 숭고를 모방하며, 모방적 숭고가 영웅의 행위를 떠맡고, 그 영웅은 자리를 옮겨 결백을 주장하며, 결정된 결백은 역사를 외면하는 수순을 따르고 있다.

<카게무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실체가 있어야 그림자도 있는 법, 실체가 없어지면 그 그림자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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