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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영화 이야기 | 영화의 늪에 빠져 죽어라!
2001-05-30

어느 시네필의 초상, 프랑수아 트뤼포

● 1984년 11월 프랑수아 트뤼포가 뇌종양으로 사망했을 때 왕년의 맹우였다가 1973년에

그와 서로를 격렬히 비판하는 편지를 주고받은 뒤 결별했던 고다르는 “이제 우리들의 보호막을 잃어버렸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고다르의 이러한

발언은 절친한 친구였던 고인에 대한 단순한 예우차원의 말만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트뤼포는 누벨바그 감독들이 각자 다른 개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응집된 힘으로 표출되도록 했던 중심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누벨바그 감독 중 가장 대중성이 있는 작품들을 꾸준히 만들어냄으로써

누벨바그 영화가 상업적으로도 일정한 힘을 발휘하도록 했던 것이다. 고다르의 시인적인 직관, 리베트의 이론가적 카리스마, 로메르의 견고한 교양주의,

샤브롤의 낙천적인 쾌락주의를 고려하면 이들이 하나로 묶여지기 힘든 사람들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들보다 나은 자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트뤼포가 짧은 기간이나마 이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고다르의 <네멋대로 해라>만 해도 트뤼포의 도움이 없었다면 실현되기 어려웠을 프로젝트였다. 로

이미 상당히 명성을 얻었던 트뤼포는 이 영화의 원안을 제공해주었을 뿐 아니라 감독으로서의 고다르에 대해 불안해 하던 이 영화의 제작자 조르주

드 보르가르를 거듭 설득해 영화가 완성되는 것을 배후에서 도와주었던 것이다. ‘출세주의’ 혹은 ‘패거리주의’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그는 자신들의

집단을 프랑스영화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영화광, 소년원에 가다

트뤼포의 삶은 그 자체로 한편의 드라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몸을 일으켜 세계적인 감독으로 성장한 과정은

후대의 젊은이들에게 ‘성공 신화’가 될 만한 것이었다. 1932년 파리에서 그가 태어났을 때 그는 아버지가 없는 자식이었다. 그의 어머니 자닌

드 몽페랑은 당시 사귀던 남자와의 사이에서 그를 낳았던 것이다. 독실한 가톨릭인 그의 외가는 시집도 안 간 자닌이 애를 낳은 것을 집안의 망신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어린 프랑수아는 8살이 될 때까지 외갓집에서 자라게 된다. 조모의 사망으로 다시 엄마 자닌의 품에 돌아간 그는 양아버지

롤랑의 성을 받아 프랑수아 트뤼포라 불리게 된다. 그의 모친은 자신의 젊은 시절 ‘실수’를 떠올리게 하는 프랑수아에게 별다른 애정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사랑받지 못하던 프랑수아는 곧 ‘골치아픈 아이’로 치부된다. 학교에 적응 못한 그는 걸핏하면 수업을 빼먹고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하면서 소일하곤 한다. 그러다가 영화관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포로가 되어버린다. 얼마 안 되는 용돈을 챙겨 영화를

보러 다니다 나중에는 입장료 때문에 돈을 훔쳐 영화를 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16살 되는 해에는 그의 단짝인 로베르 라세네와 ‘영화중독자 서클’(Cercle

Cin mane)이라는 시네클럽을 만들기에 이른다. 당시 프랑스에는 시네클럽연맹이란 기관이 있어 이 연맹에 정식으로 가입한 시네클럽인 경우

필름을 빌리기가 쉽지만 그렇지 않으면 대단히 힘들었다고 한다. 물론 트뤼포가 만든 시네클럽은 전혀 이 연맹에 가입할 형편이 못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인 수집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아니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운영자인 앙리 랑글루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꾸려갔던 것이다. 게다가

운영자금이 달리자 여기저기서 빚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고 나중에는 아버지 회사에 잠입해서 타이프를 훔치는 등의 수법으로 돈을 염출했던 것이다(의 그 장면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집으로 청구서가 쏟아져 들어오자 프랑수아의 행적을 알게 된 그의 부모는 그를 붙잡아 경찰에 보호감호처분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그는 6개월간

소년원에서 생활하게 된다. 나중에 군대에 가서도 그의 ‘부적응’은 쉽게 교정되지 않는다. 인도차이나로 떠나는 배를 타기 직전 그는 탈영을 했던

것이다. 결국 경찰에 붙잡혀 형무소행이 거의 확실시되던 순간 그의 조숙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바쟁이 당국에 강력히 탄원해서 그는 ‘정서 불안정’이라는

이유로 간신히 ‘불명예제대’를 할 수 있었다.

‘작가정책’으로 개화한 바쟁과의 만남

여기까지 그의 경력을 보면 거의 전형적인 ‘비행청소년’의 그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를 다른 이들과 구별해주는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지식에 대한 강한 갈망을 가진 소년이었다. 그 자신의 말대로 “하루에 세편의 필름, 일주일의 세권의 책을 읽는

것”을 자신의 삶의 일상적인 과제로 부여했던 것이다. 제대로 된 교사를 만나지 못한 상황에서 그는 독학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발자크와 프루스트를

읽어낸 그는 이어서 영화에 빠지게 되자 자신이 재미있게 본 영화를 만든 감독들의 리스트를 만들고 그에 관한 신문 및 잡지의 기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감독의 이름을 알파벳순으로 정리한 파일을 만들기 시작해 지금은 잊혀진 프랑스감독인 마르셀 아부커에서 시작해 프레드 진네만으로 끝나는 파일을

완성했던 것이다.

여기서 나중에 시네필들의 전형적인 행태로 간주되는 일종의 ‘지식수집벽’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및 감독에

대한 모든 정보를 차근차근 수집하고 거기에다 자기 나름의 분류에 의해 리스트를 만드는 것 말이다. 이것이 단편적인 지식을 양산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지식과 현실을 혼동하게 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그 배경에 있는 강렬한 지식을 향한 ‘갈증’만은

인정해주어도 좋을 것이다.

트뤼포가 한 사람의 비평가로 일어서는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바쟁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가능했다. 바쟁의 훈도를 받으며 그는 단순한 ‘지식수집가’에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논지를 구성하는 비평가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트뤼포가 바쟁을 처음 만나러 간 것은 1948년 자신의 시네클럽

상영회가 바쟁이 일하는 ‘노동과 문화’의 영화상영회와 같은 날짜에 열리게 되자 상영일자를 바꿔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16살밖에

되지 않는 이 소년의 열의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바쟁은 그에게 자신의 조수로 일하라고 제안했을 뿐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당대 최고의 시네필들,

예를 들면 알랭 레네, 크리스 마르케르, 알렉산드르 아스트뤽 등을 소개해주었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바쟁의 제자가 된 것은 군대에서의 탈영사건 이후였다. 군대를 나와 갈 곳이 없는 그를 바쟁이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2년간 바쟁의 집에 머물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가족의 안온함’을 맛보았을 뿐 아니라 바쟁과의 계속된 토론을 통해 자신을 지적으로

단련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바쟁은 그가 어느 정도 능력이 된다고 판단하자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기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지적 배경만 보자면 친구들인 고다르나 리베트에 비해 낫다고 할 수 없는 그였지만 글을 쓰기 전에 미리 꼼꼼히 준비할 뿐 아니라

때로는- 다소 전략적인 의미도 깔려 있는 것이지만-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곧 주목받는 비평가가 된다.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그가 시도한 것 중 오늘날에도 아주 중요한 유산으로 인정받는 것이 감독들과의 장시간에 걸친 인터뷰였다.

아직 인터뷰라는 것이 그 대상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만을 간단히 전해주는 것 정도로 생각되던 시대에 트뤼포는 장시간에 걸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포터블 녹음기에 그대로 담아 약간의 수정 외에는 거의 전문을 실었던 것이다. 감독들이 편하게 자신들의 경력이나 작업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함으로써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애초의 의도였다. 당시 포터블 녹음기라는 것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것이라는 걸 감안하면 귀찮은 작업이었음에 틀림없겠지만 트뤼포는 리베트와 함께 파트너를 이루어 장 르누아르, 막스 오퓔스, 로베르토 로셀리니,

아벨 강스, 프리츠 랑 등을 인터뷰한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감독들과 친교를 깊게 하는데 특히 로셀리니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가 되어 그뒤 잠시

동안이지만 그의 조수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영화를 위해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감독들과의 이러한 교분을 통해 트뤼포는 자신이 막연하게 상정하고 있던 ‘작가정책’에 대해 좀더 명확한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문제를 가진 감독이라면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자신도 이런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트뤼포와 고다르, ‘장인적 프로페셔널리즘’ vs ‘시대의 전위’

여기서 그와 고다르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트뤼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그들의 대립과 갈등은 단순한 라이벌 의식을 넘어서서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입장 차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트뤼포는 누벨바그의 선두주자였고 고다르는 그 트뤼포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은 편이었다. 그리하여 가 칸에서 감독상을 받았을 때 고다르는 “드디어 우리들의 시대가 도래했다”면서

열광적으로 자신들의 승리를 찬미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감독으로 인정받고 나서 둘 사이의 관계는 다소 미묘한 데가 있다. 무엇보다도 트뤼포가

60년대의 고다르 작품에 대해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반면 고다르는 트뤼포의 작품에 대해 별반 언급이 없는 편이다. 거의 무관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특히 트뤼포의 <네멋대로 해라>에 대한 평가는 대단하다. 그는 “나는 그 영화를 만들 당시의 장 뤽의

형편을 잘 안다. 그는 주머니에 지하철 티켓을 살 돈도 없을 정도로 최악의 상태였다. 그 영화에는 물러설 곳 없는 자의 결사적인 자세가 엿보여

볼 때마다 감동을 받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68년 5월 당시에는 두 사람 다 적극적으로 투쟁에 참가함으로써 여전히 돈독한 사이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 이후 트뤼포가 여전히 주류영화계에

남아 성공적인 작품을 내놓은 반면 고다르는 ‘혁명영화’에 투신함으로써 서서히 균열이 생기게 된다. 그러다 <아메리카의 밤>이 개봉될

즈음 결정적인 결별이 찾아온다. 고다르는 트뤼포에게 공개적으로 편지를 보내 그의 ‘비열함’을 비판했던 것이다. “난 자네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르겠네”라고

포문을 연 고다르는 영화를 찍는 동안에 여주인공인 재클린 비셋과 데이트를 즐겼던 트뤼포가 그것을 ‘영화만들기에 관한 영화’인 이 작품에 담지

않은 것은 비열한 태도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편지의 말미에 “세상에 자네의 영화 같은 것과 다른 영화도 있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으므로”

자신의 다음 작품에 돈을 대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이 편지에 격분한 트뤼포는 “항상 희생자인 척하는 자네의 포즈에 정말 이제 견디기 어렵네”라고

고다르의 태도를 맹비판하면서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다. 트뤼포가 보기에 그는 사기꾼이고 병적인 에고이스트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소 그늘이 져

있던 두 사람의 우정은 완전히 금이 가게 된 것이다. 1980년 고다르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로 다시 상업영화로 복귀하면서

트뤼포, 샤브롤, 리베트를 자신이 살고 있던 스위스의 롤에 초청해 토론회를 열려 했지만 트뤼포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결국 1984년 트뤼포가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이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는 고다르가 그 출발부터 견지하고 있던 ‘시대의 전위’라는 의식이 트뤼포에게는 결여되어 있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고다르의 경우 뭔가 혁신적인 것을 내놓아 시대를 선도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진 반면 트뤼포는 오히려 ‘장인적

프로페셔널리즘’을 철저히 고수하려는 입장에 가까워진다.

물론 70년대 이후, 정확히는 <아메리카의 밤> 이후 트뤼포가 거둔 상업적인 성공을 증거로 삼아 그의 성공에의 집착이 이러한 갈등을

빚어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볼 경우 아무래도 문제가 얄팍해지는 측면이 있다. 트뤼포가 분명 ‘인정받고 싶다’는 열망이 강한 감독이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감수할 정도로 단순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별의 계기가 된 논쟁

자체가 고다르의 도발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그다운 이미지 조작의 전략이라는 측면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대중적 성공 못지않게 트뤼포에게 중요했던

것 중 하나는 자신의 창작자로서의 독립성이었다. 어디에도 커미트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의는 어떤 집단이나 단체에 관여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심지어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운영위원을 맡아달라는 부탁도 거절했을 정도이다.

작가주의, 어떤 억압의 기억

트뤼포는 위대한 선배작가들에 대한 존경심을 항상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리하여 감독으로서의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업을

기리는 기회가 있으면 꼭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가령 국내에도 번역이 나와 있는 <히치콕과의 인터뷰> 같은 것이 그의 그러한

작업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을 수 있는데 그 밖에도 앙드레 바쟁, 장 르누아르, 오슨 웰스, 사샤 기트리 등 자신의 ‘영화스승’들의 책에 서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감독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다음에도 이러한 작업에 열의를 가지고 참여한 것을 보면 확실히 트뤼포의 시네필로서의 열정은

대단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태어나 자란 소년이 아버지를 찾아나선

긴 여정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한다. 이것은 그와 교분을 맺었던 많은 대가들이 그에게 보통 이상의 애정을 표현했다는 것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로셀리니, 막스 오퓔스 같은 감독들은 약간 수줍음을 타면서도 불안해 하는 그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젊은 청년을 위해 뭔가 해줘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데가 그에겐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끊임없이 아버지를

필요로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위대한 작가들은 그에게 잠시나마 아버지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모든 이들에게 다 그렇다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트뤼포에게 있어 ‘작가주의’는 ‘아버지에 대한 열망’이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확실히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이 아버지의 절대화로 이어지게 될 경우 그것은 억압적인 체계가 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트뤼포에게

애초에 고다르 같은 ‘우상파괴자’로서의 자질을 요구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체계가 어느 정도

내면화되면 아버지에 대한 거역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억압으로서의 작가주의’라고 할 만한 이러한 현상은 트뤼포 자신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후기의 걸작 <녹색

방>에서 그는 명백히 작가주의의 알레고리라고 할 만한 것을 시도하고 있다. 1차대전이 끝난 지 십년 뒤 어느 지방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결혼 직후 아름다운 아내를 잃었고 게다가 전쟁으로 자신의 많은 친구들을 잃은 것에 깊이 상심한 줄리앵 다벤이란 신문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트뤼포 자신이 직접 연기하는 이 다벤은 평소 업무에 큰 의욕을 못 느끼는 인물이지만 기묘하게도 부음기사 하나만은 놀랍도록 잘 쓰는 인물이다.

그는 죽은 자들을 금방 잊어버리는 세상사람들을 탓하면서 “그들을 기억해주면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사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죽은

친구의 딸인 세실리아의 도움으로 그는 폐허가 된 성당을 개조해 자신만의 제단을 만든다. 자신과 절친했던 사자(死者)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특별한 제단을 만든 것이다. 거기에는 영화의 원작자이자 트뤼포가 좋아하던 작가인 헨리 제임스를 필두로 장 콕토, 오스카 와일드, 모리스 조베르

등의 사진이 있고 그들과 함께 사생활에 있어 트뤼포와 절친했던 배우들인 프랑수아즈 돌레악, 오스카 베르너 등의 사진이 올려져 있다. 의도적으로

영화감독들이 배제되긴 했지만 이들은 분명 직간접으로 트뤼포에게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죽은 자들만을 기리면서 사는 삶이란 얼마나 어둡고 끔찍한 것인가. 물론 그 결과로 자신도 그 제단의 한끝을 차지할 수도 있겠지만- 트뤼포

자신에게 분명 이러한 욕심이 있었을 것이다- 사후의 명성이란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 것인가. 트뤼포가 일찍 타계한 자신의 지인들을 회고할

목적으로 애초에 기획한 이 영화는 그 자신의 욕망의 어두운 면을 드러냄으로써 그의 전경력을 통틀어 가장 개인적인 영화이면서 동시에 가장 어두운

영화가 되었던 것이다.

90년대 이후 시네필적인 것에 대한 일정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트뤼포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초반 정치적인 열기가 아직 높았던 시대에는 ‘속물적인 악덕’으로 치부되었던 시네필리는 9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사라져가는 미덕’으로

꼽히는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삶의 모든 측면이 영화와 상호 삼투되어 그 경계선이 애매한 정도가 되었다는 점에서 확실히 트뤼포는 가장

전범적인 시네필로 꼽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하여 트뤼포는 자신의 열망대로 거장들의 ‘팡테온’에 입적했다고 보아도 좋은 것일까.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일 것인가. 왜냐하면 그런 질문 자체가 시네필리의 부정적인 측면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하는 생각이 새삼 들기 때문이다.

임재철|영화평론가·<필름컬처>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