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히틀러가 부활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면, 만약 빙하가 녹아내려 지구의 땅덩이 대부분이 가라앉아버린다면, 만약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이 제2의 진주만 침공을 감행한다면…. 픽션은 ‘만약’을 사랑한다. 그리고 ‘더 큰 만약’일수록 더 강렬하게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가와구치 가이지의 <태양의 묵시록>(대원씨아이 펴냄)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만약’에 속하는 이야기다.
2002년 8월10일 오전 10시20분. 강도 8.8의 대지진이 일본 열도를 엄습한다. 곧이어 후지산이 분화를 일으키고, 동쪽, 동남쪽, 남쪽에서 연이어 일어난 거대 지진과 해일이 최악의 재난을 만들어낸다. 급기야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열도의 한가운데가 갈라져 이 나라는 완전히 두 조각으로 분단되는 지경에 이른다. 애초에 섬나라였는데, 섬이 하나 늘어났다는 게 무슨 문제겠는가? 그러나 파국의 상황을 전혀 감당할 수 없는 일본이 미국과 중국에 원조를 요청하고, 재해 복구를 빙자하여 열도에 들어선 두 강국이 북과 남을 나누어 지도권을 행사하면서 이 나라는 (우리에겐 몹시도 낯익은) 분단 통치를 받을 상황에까지 이른다.
지진, 해일, 원폭 등에 의한 초대형의 파국드라마는 일본 만화에서 결코 낯선 주제가 아니다. 1970년대의 <표류교실>, 80년대의 <아키라>, 90년대의 <드래곤 헤드>로 굳건한 연대기가 이어지고 있으며, 크고 작은 작품들이 이 주제를 다루어왔다. <태양의 묵시록>에서 가와구치 가이지가 보여주는 재난의 양상 역시 그 규모는 크지만 새롭다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침묵의 함대> <지팡구> 등에서 거대 정치를 다루는 이 만화가의 솜씨를 확인했기 때문에, 그의 진지한 시각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미래사가 충분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만화는 일본 정계의 실력가 집안에서 태어난 켄이치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 열렬한 정의감과 굳건한 현실감의 소년이 난민의 처지로 급전직하한 일본인들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펼쳐 보인다. 국내에 최근 발간된 1권에서는 어린 켄이치로가 지진 속에서 부모를 잃고 보트에서 사람들을 구하다 실종되는 상황까지를 그리고 있다. 이어질 2권에서부터는 15년 뒤인 2017년으로 훌쩍 시간을 뛰어넘어 대만의 일본인 피난 캠프로 무대를 옮겨간다. 혼란의 와중에 겨우 목숨을 구한 켄이치로가 이곳에서 청년으로 자라고 있다. 그는 일본인과 대만인 사이의 반목으로 인한 모자 살해 사건, 일본 급진파의 테러 계획 등을 통해 새로운 정치인으로 자라날 준비를 해나간다. 새롭게 그려진 동아시아 지도에서 우리나라는 어떤 형태로 등장하게 될지, 그 점 역시 기대해볼 만하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manamana@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