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붉은 돼지> 보고 편지를 쓰다

친구. 가득 찬 여백을 본 적이 있나. 슬퍼할 틈을 주지 않는 웃음과 놀이로 가득한 여백을. 내가 인간이었을 때 모두들 내게 영웅이란 찬사를 보냈지. 내가 돼지였을 때 그들은 나를 영웅이 아닌 붉은 돼지인 채로 사랑해주더군. 어처구니없는 나를 기꺼이 끌어안는 그들은, 새로운 대상을 만나면 언제고 새롭게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마음자리를 비워놓았네. 증오와 분노로 무장한 사내들의 가슴을 녹여버리던 지나의 노래처럼, 가난과 고통이 우리를 꿈꾸게 했지. 지나의 카페는 포연 속의 연꽃이라네. 지나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거친 전쟁광도 순둥이가 되고, 그녀의 카페 50㎞ 반경에서는 어떤 싸움도 일어나지 않지. 지나는 세명의 남편을 모두 전쟁통에 잃고도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네. 하물며 우락부락한데다 무뚝뚝한 돼지를 사랑할 정도니, 전쟁도 그녀의 사랑의 능력을 빼앗진 못했지 뭔가.

나는 전쟁과 공황의 상처로 얼룩진 그곳에서 축제의 꿈을 발견했네. 아이들은 총탄이 난무하는 활극 속에서도 놀이를 발견하지 않나. 아이들은 스스로 인질이 된 걸 알면서도 공중납치극의 긴장과 위험을 오히려 수백배로 불리면서 그 위험천만한 놀이를 즐기고 있었네. 총탄이 난무하는 총구 바로 밑에서 끼룩끼룩 웃어대는 아이들. 투실투실 험상궂은 나를 보고 귀엽다고 하질 않나. 내 유일한 친구였던 붉은 비행정을 하늘해적들이 박살내려하자, 날 구해준 것도 작은 여자아이, 피오였네. 비행정 조종사들이 진정 폼나는 이유는 바다와 하늘의 양쪽에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기 때문이라나. 피오를 통해 나는 인간적인 삶을 버린 내가 비행만은 포기하지 못한 이유를 알았네. 전쟁도 공황도 파시즘도 포획할 수 없는 유일한 공간이 하늘과 바다였음을. 붉은 돼지를 위해 스스로의 몸을 도박의 판돈으로 내던진 피오 덕택에 내 안에 고인 적의와 절망은 사위어갔네. 그들과 함께라면, 나는 유쾌하게 파시즘의 공포와 맞장뜰 수 있네. 세상의 속도를 거스르는 느려터진 돼지의 삶이란, 나쁘지만은 않았다네. 맞네. 날지 못하는 돼지는 돼지가 아니지. 엄숙한 권력의 장애물들 사이를 매끄럽게 질주하며, 나는 하늘과 바다를 동시에 아우르는 탈주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네.

전쟁이 죽인 것은 좋은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네. 전쟁은 저항의 꿈조차 말살했지. 파시즘과의 전투란 부끄러움을 망각한 인간 스스로와의 싸움이라 믿네. 난 미국의 뒷돈으로 이익을 챙기려던 하늘해적들을 혼쭐낼 요량으로 격투를 벌였지. 그런데 웬걸, 나의 비장한 격투는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요절복통의 축제로 변모해버렸네. 그들은 목말라 있었네. 전쟁과 공황의 상처를 잊게 해줄 곰살궂은 축제의 기쁨을. 어느새 결투의 스펙터클과 승부내기의 도박은 사라지고, 잊고 있던 아름다운 비행의 꿈이 하늘에 아로새겨지고 있었네. 오뚝이처럼 홀로 서고 싶을수록, 친구의 도움을 청해야 할 때가 있다네. 자의식이 오버하면, 스스로를 상처내기 쉽거든. 내가 함부로 돼지의 마법을 걸었던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었다네. 아이들에게 나는 푸짐한 장난감이며, 전쟁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모든 벗들에게 내 몸은 든든한 무기임을, 여전히 식지 않은 꿈임을.

왜 돼지가 되었냐고. 좋은 친구들은 모두 전쟁이 죽였거든. 왜 다시 인간이 되었느냐고. 이젠 굳이 돼지일 필요가 없잖은가. 나로 하여금 아드리아해를 지키는 늠름한 붉은 돼지의 영예를 안겨준 건 나의 비행술이 아니었네. 왜, 그런 사람 있잖나. 언제나 잔칫상을 차려놓고 떠나간 친구들을 기다리는 넉넉한 주모 같은 이. 지나는 우리에게 그런 벗이었네. 행복한 붉은 돼지가, 나 아닌 모든 나에게, 나를 잊은 모든 나에게, 편지를 쓰네. 꿈을 꿀 수 있는 자유만으로도 행복했던 과거의 나를 통해, 꿈을 잃은 지금의 나를 비추는, 한없이 아늑한 지나의 노래를 들어보게나. 언제든 놀러오게나. 붉은 돼지와 그의 친구들이 일구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로.정여울/ 미디어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