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게다가 옛날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자막 한복판에- 크게, 필기체의 ‘The End’가 두둥실 떠오르는 장면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한다. ‘The End’라니! 그러니까 팝콘을 씹으며, 나는 얼마나 ‘두둥실’ 떠올랐던가. 옛날에는. 그러니까, 옛날에는 말이다. 그리고
굳이 옛날 영화가 아니어도, 모든 영화는 끝이 난다. 그것이 필기체가 아닌 고딕체여도, 해피엔딩이 아닌 새드무비여도- 이것이 끝이야, 내 아름다운 친구야. 나의 복잡했던 계획도 이걸로 끝이야. 웃음도 마지막, 달콤한 거짓말도 마지막. 죽으려 했던 모든 밤도 이것이 끝이야, 끝- 마치 짐 모리슨의 처럼 그래, 끝이야, 끝. 그런 대로
이 얼마나 공평한가. 나는 생각했었다. 즐거움도 슬픔도, 어떤 웃음과 달콤한 거짓말도, 언젠가 끝이 난다는 사실. 글쎄 복잡한 너의 계획도 그걸로 끝이라는 사실. 영화도, 우리의 삶도, 서기 2003년도, 로또로 인생을 역전한 너도, 쥐뿔이 없어 오늘밤 죽으려는 너도- 언젠가 그걸로 끝이라는 사실. 그러나
아니라니까. 끝은 하나의 음모야. 친구이자 오컬트의 대마왕 J는 그렇게 주장한다. 노동력의 손실을 막기 위해 크리스마스 시즌을 만든 거야. 실제로 12월25일은 예수의 탄생과 무관한 날이라니까. 노예들에게 힘든 기억을 떨치게 하고, 푹 쉰 듯한 환상을 주기 위해 만든 거라구. 12월이라고 회사 안 가냐? 1월이라고, 사는 게 달라지냐고? 연말이 없으면, 또 크리스마스가 없다면 아마 이 세상은 쿠데타로 넘쳐날걸? 그래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지. 하릴없이, 온종일 신문지에 천자문 쓰는 게 낙인- 골목슈퍼의 주인 H는 중얼거린다. 자알 썼다. 자신이 쓴 삼 수(?)변의 삐침을 내려보며,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늘 천 따 지. 그러고 보니 천자문의 끝은 뭐죠? 언재호야(焉哉乎也)! 모든 게 무(無)로 돌아간단 뜻이지. 허무하니 욕심을 버리고 현실과 체제에 순응하란 얘기야. 이런 세상에나! 하늘과 땅과 우주에서 시작해, 결국 체제에 순응하라니! 그러므로
결국 세상은 용두사미다. 천자문도, 짐 모리슨도, 복잡했던 너의 계획도, 서기 2003년도, 웃음도 거짓말도, 너도, 나도- 결국은 용두사미다. 스륵스륵 지나가는 저 뱀꼬리를 바라보며, 나는 신문지처럼 어지러운 마음 위에 휙, 마치 삼 수(?)변과도 같은 어떤 획을- 친다, 그린다, 삐친다. 자알 견뎠다. 자신이 지나온 획을 돌아보면, 인간은 누구나 삐치게 마련이다. ‘The End’는 영화에만 있다. 아주 오래전에는, 그런 영화들이 있었다. 그래서
해피엔딩은 없다. 지난 15일 시작된 ‘잠 안 자고 영화 보기’ 이벤트에선 이민(38·경기 일산)씨가 우승하고, 그는 59시간4분의 한국 신기록을 달성하고, 그러니까 18일 오전 6시34분- 그는 서른두편째의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끝으로 눈을 비비며 자리를 일어서고, 아직도 이 부문의 기네스 기록은 62시간17분인데- 해서 결국은 삶이, 서기 2003년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었음을, 나는 직감한다. 뭐야, 끝이 아니었잖아? 마치 잠을 안 자고 보는 영화 같애. 졸려, 잠이 와. 59시간4분이라니, 마치 전태일의 하루 노동시간과 비슷한 어감이잖아. 하루가, 그렇게 길었나? 한해가, 이렇게 짧은 것이었나? 길고 긴 하루가 만들어내는, 그래서 짧고 짧은 우리의 한해. 이것이 끝이 아냐, 내 아름다운 친구야. 그러니까, 그래, 이곳은 사실 베이스 캠프야. 봐, 펼쳐진 하늘과 땅이 보이지? 자 불이라도 쪼이게. 복잡한 계획과 슬픔, 또 웃음과 달콤한 거짓말을 생각해둬야만 할 거야. 새해에도 그래, 허무하니 욕심을 버리고 현실과 체제에 순응해야지. 그런데
요즘은 이런 식으로 허를 찌르나보지? 잠을 실컷 자고, <매트릭스2 리로디드>를 보던 나는 시큰둥하다. ‘결론은 다음 편에’(To Be Concluded)… 결론은, 다음 편에 있다. 내 아름다운 친구여. 결론은, 다음 편에 있다고 해. 어쩌지? 불을, 더 지필까?
박민규/ 무규칙이종소설가